자기 인생에 이름을 붙인다는 말이 얼핏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인생을 사는 것이지 인생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어법이 다소 비논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자기 삶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 더 멋지고 훌륭해 보인다.

며칠 전 고등학교 1학년인 딸이 문자를 보냈다. 호를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호를 갖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또래이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호를 갖고자 하는 배경을 물으니 학교 한문시간의 수행평가 과제라는 것이다.

   
'호' 지어 주세요, 아버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딸 이름을 한글로 지어준 나에게 한문으로만 호를 지어야 하는 한문 과목 수행과제는 좀 의아했지만,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한글이든 한문이든 남이 들어서 이해하고 내가 좋으면 그뿐이긴 하다.

사람은 누구나 이름을 갖고 있다. 이것은 복잡한 사회 관계 속에서 개성을 억제하고 획일화될 수 있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주민번호나 사원번호처럼 통제를 목적으로 사람에 일련번호를 매기는 일이 아니라 의미를 갖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이름을 짓는 일이다.

그래서 세계인권선언이나 국제사회권조약 그리고 어린이·청소년협약에서 이름을 가질 권리를 명기하고 있다. 내 삶의 의미, 내가 인간임을 표현하는 가장 인격적인 방법이 이름을 잘 지어 부르는 일이다. 이름은 자신의 것이지만 남이 부르는 것이다.

대부분 태어나서 부모가 이름을 지어 주게 되는데 이것은 부모가 자신에 대한 바람이나 생활조건, 부모의 인생관들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정작 이름의 주인인 나는 자신의 이름에 자신의 바람대로 담을 수가 없다. 이럴 때 또 다른 별칭인 '호'를 갖고 있으면 그것은 자신이 귀속적으로 터득한 삶과 바람을 담고 그 뜻으로 불리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자기 스스로가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호를 갖는 다는 것은 자기 삶을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하나의 표상이기도 하다.

호는 친구, 스승이 지어 줄 수 있지만, 자신이 지어도 괜찮다. 고려시대 문인이 이규보는 자신의 호를 백운거사 즉 흰구름처럼 사는 선비라고 짓고는 "구름을 본받고 배워서 나가서는 만물에 은택을 끼치고 들어와서는 마음을 비워 깨끗이 하며, 그 구름처럼 깨끗하고 변함없는 마음을 지키고 간직하여 유유히 온전한 자연의 세계로 들어가면 구름이 내가 된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참된 이치를 터득했던 옛 사람들과 비슷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호를 지은 뜻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다. 이름과 별도로 호를 짓고 그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런 맥락에서 누구든지 호를 짓고자 하면 삶을 성찰하게 된다고 본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  

감수성이 뛰어난 청소년기에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남에게 불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짓는 것은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적극적인 작업이다. 바로 부모의 기대와 바람이 '이름'으로 표현되었다면, 자기 스스로가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희망이 '호'에 섞여 있는 것이다.

맑고 크고 넓은 여름 하늘이라는 이름의 '정호(晶昊)'를 선택하지 않고 풍요하고 남에게 베푼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민천(旻天)'과 연결해 스스로 '맑고 투명한 자애로운 가을하늘'이라는 의미로 '정민(晶旻)'을 선택한 딸은 그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인생을 설계할 것을 믿는다.

호연의 기상을 갖고 진취적으로 나가는 바람을 갖고 있는 아비와는 달리 오히려 푸근한 맘으로 세상에 덕을 펼쳐 보이겠다는 인생관을 딸이 형성하겠구나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한 식별뿐만 아니라 존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물며 사람에게 아름다운 희망을 담아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내가 남에게 돈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실천법이다. 또 내가 스스로 내 삶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완전한 자아실현이자 행복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객관적인 징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자기가 살아가고자 하는 자립의식이고 자기 존중의 구체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사람이나 사물에 바른 이름을 지어주고 그렇게 부르는 행위인 정명(正名)은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일이다. 인권은 존중에서 시작되고 자기의 권리를 지킨다는 것은 호를 스스로 짓고 널리 알려 남이 쓰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이참에 내 삶에 이름을 다시 붙여 봐야겠다.

/이창수 새사회연대 대표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