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과 생명공학의 충돌

현재 우리 사회는 ‘인간의 존엄과 생명공학의 충돌’의 과정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값싼 애국심과 국익론 그리고 음모론과 국제기준의 윤리’가 대립되고 있다.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는 수의대 관계자와 서로 부둥켜 안은 채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황우석 교수님의 눈물이 연구의 성과를 폄훼하는 세력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인지, 아니면 국제적인 윤리기준을 지키지 못한 연구자의 반성의 눈물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 하태영 교수.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근본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왜 인간은 존엄한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니면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인간은 사유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니면 사유를 통한 도덕적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인간은 스스로 존엄하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은 우리의 관념의 세계에 존재할 뿐이다. 전능(全能), 신(神), 영혼(靈魂)의 불멸(不滅) 등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을 증명할 수 없지만, 또한 그냥 버릴 수 없다. 관념의 세계에 있는 이러한 것들은 우리 인간의 삶에서 하나의 ‘통제원리(統制原理)’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존엄의 핵심은 도덕적 자율성에 있다고 본 칸트의 말이 맞다고 본다. 누구도 다른 인간을 함부로 죽일 수 없고, 이유 없이 가혹하게 다룰 수도 없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타인의 도덕적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강간, 체포감금, 강요 등을 생각하면 된다.

배아줄기세포연구로 다시 돌아가자. 난자와 배아는 인간생명의 기초이다. 난자와 배아는 타인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단순한 연구용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난자와 배아는 인간생명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로지 목적(目的)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도덕법칙에 반하는 행위다. 이것은 자연법 사상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증법 사상이 있다. 이 경우 배아줄기세포연구는 법을 통해서만 허용된다. 더 많은 공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증법 사상을 옹호한다고 하더라도, 난자의 기증 절차와 방법은 자발적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발(自發)이란 바로 윤리적 요소의 핵심이다. 비자발이라는 것은 강간(强姦)행위와 같다.

돈을 지급하고 난자를 구입하는 것은 돈을 통해 제공자의 자발성을 강제한 것이고, 연구원의 난자를 채취한 것은 연구실 구조상 권력관계에 의한 자발성의 강제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황우석 교수의 행위가 인간의 존엄의 핵심인 도덕적 자율성을 침해한 것이다. 황우석 교수는 본인도 스스로 밝혔듯이, 연구자의 도덕적 자율성을 망각하고, 타인의 도덕적 자율성을 훼손했다고 본다. 이것이 국제사회의 관심이고, 비난이다.

황우석 교수는 “외국에서도 성공 못하는 난공불락인 것을 우리가 했다. 그때 그 심정은 제가 만약 여성이었다면 제 난자를 뽑아서 실험을 하고 싶었던 심정이었다”며 당시 연구원의 난자 기증에 대한 불가피했던 상황을 대변했다(“채찍과 돌팔매는 저에게 몰아주십시오” 침통, 착잡, 회한… 외롭고 참담했던 1시간의 황교수 회견).

그러나 이러한 그의 변(辯)은 모두 국익우선의 발상, 연구 중심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 국제미아(國際迷兒)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존엄의 핵심인 도덕적 자율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차이라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논리로는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없다.

황우석 교수는 칸트의 묘비에 있는 <실천이성비판>의 글을 한번쯤 음미했으면 한다. 이것은 서양의 연구자들에게 기본이 되는 정언명령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또 그 기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더욱 더 새로우며 그리고 더욱 강한 감탄과 숭경(崇敬)의 염(念)으로써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의 위에 있는 반짝이는 별과 나의 안에 있는 도덕법칙(道德法則)이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우려가 있다. 과학자를 사랑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인간존엄과 생명공학의 충돌은 애국심으로 돌파해서는 안 된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너의 행위의 격률이 너의 의지에 의하여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있듯이 행위하라”(Handel so, dass die Maxime deines Willens jederzeit zugleich als Prinzip einer allgemeinen Gesetgebung gelten k&ouml;nnen).

우리는 인간존엄과 생명공학의 충돌의 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합의될 때 황우석 교수는 정언명령에 따라 숭고한 연구를 계속 진행할 수 있다.

/하태영(경남대 법학과 교수)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