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가 장난감에서 농사일 도우미까지 ‘전천후 신발’

어려웠던 시절 전 국민의 1급 필수품이었던 검정고무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신고 다녔던 전천후 자가용이었다. 그 검정고무신이 먹고 살기가 나아지면서 지금은 가정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검정고무신은 주변의 환경을 놀이로 삼았던 시골 아이들이 신기에는 더 없이 좋았다. 무논에 수시로 들락거리는 농민들에게도 딱 맞는 신발이었다. 진흙구덩이에도, 흙탕물에도, 못 들어가는 곳이 없었다. 흙이 묻어 더러워지면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금방 새신이 되었다. 신이 물에 젖어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풀잎으로 한두 번 닦고 나면 금방 말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공놀이를 할 때도 짚으로 한두 번 동여매고 나면 운동화 못지않았다. 성급한 아이들은 그냥 공을 차다가 공보다도 고무신이 더 멀리 날아가기도 했다. 체육시간이나 운동회는 때는 빨리 달리기 위해 두 손에 한 짝씩 쥐고 맨발로 달렸다.

또한 검정고무신은 그 시절 아이들의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흙장난을 해도 물장난을 해도 검정고무신은 필수였다. 가재를 잡고 미꾸라지를 잡을 때도 신고 있는 신발을 벗어 물을 퍼냈다. 잡은 고기는 신발에 담아 별도의 그릇이 필요 없었다.

떨어진 검정고무신은 집구석 깊숙한 곳에 동생이 모르게 숨겨 두었다가 엿장수 가위소리가 동네 길에 울리면 살짝 꺼내 엿을 바꿔 먹었다. 엿장수 리어카의 고물은 언제나 떨어진 고무신이 수북하게 쌓였을 정도로 당시 1등 고물이었다.

70년대만 해도 시골 학교 교실의 신발장에는 비슷한 크기의 까만색 일색이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제 신발을 찾지 못해 종종 신발이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새로 사 신은 신발은 손대지 말라며 흰 실로 아예 이름을 큼직하게 새겼다.

시골 장터의 고무신 가게는 돈 잘 버는 명당으로 이름을 날렸다. 고무신 가게는 내기는 힘들었지만 한번 문을 열었다 하면 큰 돈을 벌었다. 물건을 팔기 위해 특별히 애를 태울 필요도 없었다.

입 닫고 있어도 때 되면 팔렸기 때문이었다. 전 국민이 반드시 신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보니 재고 걱정도 없었다. 유행을 타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썩는 물건도 아니다 보니 배를 튕겨가며 물건을 팔았다. 그 시절 고무신 장사는 눈 감고 있어도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무신 공장도 엄청난 호황을 맞았다. 급격한 인구 증가의 붐을 타고 주문 물량이 쏟아져 밤낮으로 공장을 돌렸다. 봉제공장과 함께 우리나라 산업의 중요한 한 축으로 등장했다. 부산의 국제상사나 진양고무 등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타이야표 고무신은 아이들이 가장 즐겨 찾는 메이커였다. 같은 검정고무신이었지만 타이야표를 신었다고 어깨를 우쭐거리기도 했다. 당시 시골에서 부산에 취직을 했다하면 고무신 공장이었다.

그 잘나가던 고무신 공장이 우렁찬 기계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그 아성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고무신은 급격히 수요가 줄며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 영광의 고무신 자리에는 운동화가 차지해버렸다. 부산경제의 대명사인 고무신 공장은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지금은 거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물가조사에서 필수품이던 고무신이 1985년 조사 대상에서도 빠졌다. 고무신의 화려한 영광은 끝이었다. 이제는 절집이나 상가가 아니면 고무신을 신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다 60~70년대 같은 고무신의 전성기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한때 전 국민의 필수품이자 추억의 검정고무신은 영원히 우리 곁에서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

창원에 사는 유건영(48)씨는 고무신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초등학교 때를 떠올리며 정신이 아찔하다고 한다. 그날 장대 같은 폭우가 내려 도중에 공부를 파했다고 한다. 모두 다 골짝에서 모인 아이들이다 보니 개울물이 불어나기 전에 집으로 가야 했다. 학교까지는 두 서너 개의 개울을 건너야 해 큰 비가 내리면 제일 문제였다.

밤새 폭우가 쏟아져 개울물이 많이 불어나면 아예 학교를 가지 못했다. 지금은 개울마다 다리가 놓여 걱정이 없지만 당시에는 비만 내리면 아이들에게 엄청난 공포였다.

그 날도 공부하는 도중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학교에서는 하던 수업을 중단하고 물이 더 불어나기 전에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학교 문을 나서니 골짝에서 모여든 물은 순식간에 불어 붉은 흙탕물이 무섭게 요동을 쳤다.

개울을 휘어 감는 급류가 무서웠지만 집으로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기 때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모두 다 책 보따리는 물에 젖지 않게 양어깨에 단단히 묶었다. 고무신은 벗어 양손에 하나씩 쥐고 개울을 건널 준비를 갖추었다.

물살이 너무 세 혼자서는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개울 앞에는 한 골짝 아이들이 다 모일 때 까지 기다렸다. 마지막 꼴찌가 도착하면 3~4명씩 팔을 걸어 꽉 잡고 큰 물길을 건넜다. 잘못하여 삐끗하는 날에는 급류에 휩쓸리기 때문에 모두다 긴장감이 팽팽했다. 얼굴에는 모두 저 물을 어떻게 건너야 하는 두려움뿐이었다.

   
한 발 두 발 조심스럽게 앞으로 발을 움직이면 물은 점점 차올랐다. 아이들은 자신이 급류에 떠내려가는 것 보다 어깨에 울러 멘 책이 물에 젖을까봐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온통 신경을 집중했다.

연방 책 보따리를 어깨로 밀어 올려 보지만 거기가 거기였다. 중심을 삐끗하여 몸이 숙여 지면서 어깨에 멘 책 보따리를 물에 담그는 것은 예사였다.

큰물이 한번 지나고 나면 신발을 물에 떠내려 보내고 한쪽 신발 없이 맨발로 십리 돌밭 길을 절뚝거리며 학교를 오는 일이 허다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첩첩산골에 신발을 파는 곳도 없었고 지금처럼 신발을 두 켤레 세 켤레씩 놔두고 번갈아 가면 신는 것도 아니었다.

한 켤레로 일 년 내내 신다보니 잃어버리면 다음 장날까지 맨발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책을 떠내려 보내고 공책만 달랑 들고 오는 아이도 있었다. 반 아이들의 책은 물에 불어 터져 책 겉은 터실터실해져 거의 헌책이 되어 버렸다.

개울의 중간쯤 도착하면 가슴까지 물이 차올랐다. 심한 공포감이 엄습했다. 옆 사람의 손을 놓는 날에는 큰 낭패였다.

거기서 두 서너 발만 앞으로 비껴서면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지만 그 두 서너 발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 모두 센 물살에 혹시나 어찌 될까봐 벌벌 떨었다. 먼저 건넌 아이들이나 뒤따라오는 아이들은 물에 빠진 쥐새끼 행세를 하고 모두 숨죽였다.

그날 자신도 개울을 건너다가 세찬 물살에 중심을 잃고 옆으로 넘어지면서 손에 꼭 쥔 고무신을 놓아 버렸다. 아차 하는 순식간에 고무신은 보이지 않았다. 짧은 몇 초 사이에 신발이 없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가난한 살림에 이 검정고무신도 겨우 겨우 사 주었는데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떠올랐다.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신발을 잡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내 신발 하면서 손을 뻗다가 그만 급류에 휩쓸려 버렸다.

모든 아이들이 떠내려가는 자신을 보고 발만 동동 굴렸다. 무의식적으로 살려 달라는 고함을 질렀다. 50m 정도 떠내려갔는데 고함 서너 번을 지른 것이 끝이었다. 물살이 자신의 온몸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때 마침 물꼬를 단속하려 나온 아랫마을 어른이 발견해 떠내려가는 자신을 구해줘 살았다고 한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니 집에 와 누워있더라는 것이다. 그 충격으로 한동안 학교를 나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 고무신이 뭐라고… 자신을 부둥켜안고 그렇게 많이 울었다.

신발 하나 제대로 못 사 신는 처지를 생각하며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는 가끔 고무신 한 켤레에 자식을 잃을 뻔 했다며 그 때의 충격을 떠올리곤 한다.

유씨는 지금도 큰비가 내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것이다. 사진에 나오는 검은 고무신만 봐도 정신이 아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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