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재활의 땅에서 싹튼 ‘예술과 사랑’

암울했던 일제시절 요양원을 거쳐간 문인으로서 임화(林和:1908~1953)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본명이 이현욱(李賢郁)인 그는 약관의 나이에 KAPF를 조직, 서기장이 될 정도로 무산계급을 대변하는 문인으로서 일약 유명하였다. 월북한 그는 1953년, 김일성파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는데, 억울하게도 미제간첩의 누명을 쓰고 어이없이 희생되고 말았다. 임화의 아내 지하련(池河連)은 마산출신 문인이었다. 둘은 요양소에서 로맨스를 꽃 피웠는데 폐결핵환자였던 임화를 위해 지하련은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다. 임화는 지하련의 애틋한 사랑에 감화되어 결혼하였다. 이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무대가 바로 요양원이었다.

비운의 문학가 임화·마산출신 문인 지하련 결혼

임화
한국전쟁 때 만주에 소개해있던 지하련은 임화의 사형소식을 듣고 미치광이가 되어 끝내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지하련은 1940년 <문장>지에 <결별>을 발표, 문단에 데뷔했다. 단편 <결별>·<가을> 등을 대표작으로 남겼는데 그 누구보다도 여성의 심리를 이성적으로 관찰한 작가로 주로 소시민의 상극적인 심리상태를 잘 묘사했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1956년 마산방송국에 재직하고 있던 반야월(박창오)이 가장 절친했던 친구 이재호(李在鎬)를 찾아 마산요양원에 문병을 갔다. 그 날 위문공연도 함께했다. 요양원은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장을 연상시켰다. 그때 마침 하얀 소복을 한 묘령의 여인이 호젓한 숲길을 거닐고 있음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찬 이 여인 역시 폐결핵환자였다. 완쾌된다는 보장도 없이 그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외로운 모습이 서녘하늘에 타는 붉은 노을마저 애처로운 분위기를 더욱 자아내고 있었다.

반야월은 당장 만년필을 뽑아들고 청순 가련한 이 여인의 비감 어린 심정을 아는 듯이 노랫말을 적었다. 제목은 <산장의 여인>으로 정했다. 폐결핵환자였던 이재호가 즉시 곡을 붙였다. 이런 사연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당시 KBS전속가수로 활약하던 권혜경이 취입했다.

권혜경은 이 노래 한 곡으로 1950년대의 톱싱어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이 가사를 쓴 반야월은 마산출신으로, 진주출신인 이재호가 곡을 붙인 <꽃마차>, <넋두리 20년>과 같은 자신이 부른 노래에 가사를 지었다. 작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추미림, 박남포 등 여러 필명으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5000편에 달한다고 하며 작곡가의 손에 넘어간 채 미발표된 가사만도 2500여 곡에 이른다고 한다.

서슬퍼런 유신독재의 공포가 절정에 달했던 1975년 그 해 사상계잡지에다 <오적>의 시를 실어 일약 유명해진 김지하 시인도 한때나마 요양원을 거쳐간 사실이 있다. 김지하가 요양원에 머물렀을 때 중앙정보부요원의 집요한 감시 때문에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실례를 든다면 75년쯤, 일본 문예춘추잡지가 주관하여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진 아쿠다가와상을 그 해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재일교포작가 이회성(李恢成)이다. 그는 수상작품 <다듬이질하는 여인>으로 해서 탁월한 문학가로서 장래가 촉망된다고 평판이 자자했다. 이 무렵 한국일보가 주선하여 모국을 방문하였는데 이회성이 김지하를 만나고 싶다고 간청하는 바람에 마산까지 내려왔다. 이회성은 끝내 김지하를 만나지 못했으니 당시 극심했던 감시와 인권유린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가포 전경
이 밖에도 문인이었던 권환, 이영도 구상 등과, 재야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진 계훈제, 영화인 최백산 등도 한 때 요양원에 머물다 가기도 했다.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말할 것 같으면 60대를 넘긴 올드 팬들은 기억해 낼 수 있는 <3천만의 꽃다발>이라 하겠다. 195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촬영 8개월로 완성된 16㎜판 영화였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보면 한국전에 나가 부상을 당해 실명한 자식에게 자기 눈을 빼내 각막이식으로 광명을 찾게 하여 다시 출전시킨다는 단조로
반야월
운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모성애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관제군사영화였다. 출연진은 당시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조미령, 마산출신 시인 정진업, 김수돈을 비롯해 이규숙, 박명 등이 등장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주로 요양원을 위주로 하고 앵기밭골에 있는 무학농원, 육군 군의학교 등지에서 촬영했다.

반야월 가포 찾아 작사한 ‘산장의 여인’ 50년대 풍미

이 영화에 친일기업인 한일봉이 능수능란하게 말을 몰고 달리는 모습은 눈길을 끌만하다. 이 작품의 연출은 신경균이었으며, 촬영은 김찬영이었다. 이 영화의 기획·연출 분야는 제2육군병원이 맡았고, 마산결핵요양원이 후원을 맡기도 하였다.

어디까지나 쾌적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상징하고도 남을 국립결핵요양원은 결핵으로 인해 꺼져가는 생명을 일으키는 재활의 둥지요, 삶의 윤기를 더해주는 안식처이기도 하였다. 국립결핵요양원 뿐만 아니라 신생국립결핵요양소, 철도요양소 등 3개소가 밀집되었던 것은 그만치 마산의 따뜻한 기후와 맑은 공기가 바로 건강을 되찾는데 가장 알맞은 요양지였기 때문이다.

/홍중조(전 경남도민일보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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