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눈을 품었으니 세상은 참선

지리산이 드디어 눈을 이었다. 그동안 겨울가뭄과 따뜻한 날씨 탓에 눈은커녕 얼음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지리산에 눈이 쏟아져 내린 것이다.
눈이 지난 밤사이 내리고 아침 들어서는 그쳤건만 우리나라 3대 골짜기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지리산 들머리 칠선계곡에는 여전히 눈발이 날린다. 함양 들어설 때만 해도 햇살이 쨍쨍했으나 칠선계곡이 있는 마천면에 들자마자 구름이 잔뜩 낀 날씨로 바뀌었다.
골짜기는 바람이 드세다. 아마 평소에도 바람은 불어서 저렇게 소리를 내었겠지만 오늘따라 유별나게 ‘쏴아쏴아’ 화살이 떼지어 날아가는 소리를 내고 있다. 어찌 들으면 여름철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쏟아지는 물소리를 닮은 듯도 한데 천지가 눈을 덮어쓰고 조용한 가운데 바람은 저처럼 혼자 기세가 올라 있다.
절간에 이르는 길은 스님들이 비질을 해서인지 눈들이 길섶으로 몰려 있는데 한가운데는 그새를 못참고 얼어붙어 버렸다. 양쪽 잎진 참나무들 품에 안겨 있는 이 길들은 낯선 이의 난데없는 방문에도 ‘미끄러질라, 조심하시오’를 연발한다.
중턱에 자리잡은 절간은 풍경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하다. 벽송사 앞 텃밭에는 고추랑 토마토 줄기들이 대나무로 만들어 꽂아둔 버팀대에 기댄 채 입선(立禪)의 경지에 들었다. 줄 맞춰 마른 채 소리없이 서 있는 저것들은 지난 한철 스님네 울력을 넘치도록 받았을 것이다.
선정(禪定)에 든 것은 뿐만이 아니다. 더욱 가난해져 한결 꾸밈없이 온몸을 칼바람에 드러내놓은 잎진 나무들도 가지마다 눈을 얹은 채 서서 참선에 들었다. 참나무 가지 마디에 자리잡은 겨우살이들도, 비록 제 힘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남의집살이를 하느라 허공에 매달렸을지언정 참선은 잊지 않았다.
새로 짓는 대웅전은 기와마다 반쯤 눈이 얹혔는데 뒤쪽 우거진 대숲 또한 몸통을 앞뒤로 흔들며 ‘우수수’ 참선하고 있다. 발목까지 쌓인 눈더미를 헤쳐 보면 냉이랑 쑥이랑 고들빼기·질경이 따위들도 아마 입선은 아니라도 좌선(坐禪)은 하고 있을 것이다. 달래 같은 것들은 땅 속에 드러누워 와선(臥禪)에 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달을 바라다본다는 간월루(看月樓) 뒤쪽 산언덕에도 소나무 하나 우뚝 솟은 채 수행에 열중이고 여름철 간지럼을 태우듯 한바탕 뜨거운 꽃잎을 뿜어냈을 배롱나무도 뜰안에서 몸을 비튼 채 수양을 하고 있다.
벽송사 자랑거리인 들머리 암수 장승도 하나는 삭은 채로 하나는 두 눈 부릅뜬 채로 전각 안에서 제각각 참선 중이다. 그러고 보니 함양에는 유다르게 나무장승이 많다. 당대의 생활상을 담은 문화유산인 판소리 ‘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에서 강쇠·옹녀 부부가 장승을 패서 떼는 주무대가 바로 이곳 마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안도 월경촌(月景村) 계집’ 옹녀가 열다섯부터 스무 살까지 해마다 맞아들인 서방을 송장 치우고 쫓겨나 삼남으로 향하다가 청석관에서 변강쇠를 만나 ‘허벌나게’ 놀아나다 자리잡은 데가 여기 “토후(土厚)하여 생리(生利)가 좋다 하는 남 지리(地異)”였다.
그러다가 옹녀 등쌀에 못이겨 나무하러 나온 강쇠가 “동구 마천 백모촌”에서 초동 아이들 노랫소리를 듣고 “도끼 빼어 들어메고 이 봉 저 봉 다니면서” 시늉을 하다 점심 한 구럭 잘 먹은 뒤 솔 아래 낮잠까지 자고 게을리 일어나서 장승 뽑아 땔감으로 쓰는 바람에 급살(急煞)을 맞는 배경 장소가 바로 여기이지 않은가.
벽송사와 등을 맞대고 있는 서암은 바위절이라 할만하다. 사천왕에서 비로자나불까지는 물론 용왕님조차 바위에 새겨놓았고 중요한 전각들도 바위를 뚫고 들어앉았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엊은 데는 대웅전과 공양간 정도뿐인데 처마밑에서 얘기를 주고받던 보살 두 분과 처사 한 분이 천연스레 눈을 돌려 구름뿐인 하늘을 본다.
서암은 대체로 새로 만든 절이라 고즈넉하지는 않지만 기상이 씩씩하다. 아마 사람 들끓는 철에 왔더라면 느낌이 달랐을 터인데 지금은 눈을 인 바위 한가운데를 파고 들어가 가부좌를 튼 부처님들이 말 그대로 용맹스러워 보인다. 대방광전(大方廣殿)이라 적힌 들머리 앞에는 아름드리 좋은 나무가 그대로 눈을 맞는다.
아래 골짜기는 날리는 눈가루로 뿌옇기만 하다. 논밭들은 계단을 지어 산비탈을 따라 조각조각 다락 같이 붙어 있다. 산마루로 오르며 하얀 조개껍데기처럼 비탈마다 총총 깔린 물건들은 무덤인 줄 알았더니 자세히 보니 크고작은 바위들이다.
왼쪽 산 너머에서는 부옇게 뻗어나오는 기운이 있어 해가 그쪽에 있는 줄 알겠다. 골짜기는 산무더기 두 개가 겹쳐지는 틈을 타고 자리잡은 추성마을 뒤로 줄곧 이어진다. 골짝 틈새를 메우고야 말겠다는 듯이 눈은 내리고.

찾아가는 길

벽송사와 서암은 칠선계곡 들머리인 함양군 마천면 추송마을 건너편 산중턱에 있다. 그러니까 진주나 창원·마산쪽에서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생초 나들목에서 나와 왼쪽으로 접어들면 된다.
만약 여기서 다리를 건너 국도 3호선을 탔다면 본통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다시 왼쪽으로 틀어 유림면을 거쳐서 마천면 의탄마을까지 들어간다.
국도 3호선 대신 다리를 건너기 전에 지방도로 접어든 때에는 중앙선 없는 좁은 아스팔트길을 따라가다 화계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달려든다. 다시 유림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은 다음 곧이어 나오는 서주마을 삼거리에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줄곧 달려가면 의탄마을이 나온다.
의탄마을 들머리에는 차 한 대가 다닐만한 좁다란 콘크리트 다리가 있는데 이른바 ‘아치’ 모양으로 제법 멋을 내놓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길 끝에 추송마을이 놓여 있고 들머리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옆구리를 기어오르면 서암과 벽송사가 차례대로 끌려나온다.
88올림픽고속도로와 잇닿은 창녕·합천·거창쪽에서는 마땅히 88고속도로를 타면 된다. 함양나들목에서 나와 읍내를 거쳐 유림을 지나 서주마을 삼거리로 이르는 수도 있고 3번 국도를 따라가다 본통주유소에서 방향을 잡아드는 수도 있다.
대중교통을 통해 가려면 일단 진주나 함양까지 가야 한다.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함야 가는 버스는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5~10분마다 한 대씩 있다. 함양에서 칠선계곡이 있는 추성마을까지 가는 버스는 아침 7시부터 12시까지(8시 30분은 빠짐), 다시 낮 1시 30분부터 저녁 7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차가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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