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을 구기지 않으면서도 전례 없이 공손하다."

북미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서한에 대해 북한이 보인 공식반응은 이 한마디로 평가할 수 있다.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의 서한 발표 약 8시간 30분만인 25일 7시 30분께 서둘러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를 발표, 유연한 입장을 보이며 대화를 지속하자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외무성 관계자들을 앞세워 회담 재검토를 언급하고 비난을 쏟아내면서 치열한 기싸움을 하다가 정작 미국이 회담을 전격 취소하자 서둘러 수습에 나서는 모습이다.

더욱이 김계관 제1부상이 이날 담화를 '위임'에 따른 것이라고 못 박은 것은 사실상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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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연합뉴스

북한은 담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시종일관 '대통령'이라고 깍듯이 대접하고 치켜세우기도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돌려보겠다는 듯한 낮은 자세로 일관했다.

김 제1부상은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시기 그 어느 대통령도 내리지 못한 용단을 내리고 수뇌상봉이라는 중대사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데 대해 의연 내심 높이 평가했다"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세변화의 공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돌렸다.

특히 "우리 국무위원장께서도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면 좋은 시작을 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를 위한 준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며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에 거는 기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최근 북핵모델로 새로 등장한 '트럼프방식'에 대해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면서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다"고 강조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 나오기를 희망했다.

전날 북한이 남한과 외국의 언론들을 초청한 가운데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를 치른 뒤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 통보로 '뒤통수'를 맞았음에도 미국에 대한 비난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전날 최선희 부상이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향해 험담하며 정상회담 재검토를 언급한 데 대해 "사실 조미수뇌상봉을 앞두고 일방적인 핵폐기를 압박해온 미국측의 지나친 언행이 불러온 반발에 지나지 않았다"며 '변명'조의 언급을 하기도 했다.

북한 내부적으로 김계관 제1부상의 첫 회담 재검토 발언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최 부상의 비난 담화까지 이어지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를 가져온 데 대해 전략적 판단 착오를 인정하고 대응조치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김계관 제1부상이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에 대해 "우리로서는 뜻밖의 일"이라고 표현한 데서도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데 따른 당혹감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리비아모델을 고집하며 북미정상회담에 찬물을 끼얹던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거리를 둔 모습을 보였듯이 북한도 최 부상의 담화를 '개인 탓'으로 돌리며 당분간 공식석상에서 배제할 가능성도 있다.

또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 서한에 김 제1부상의 담화를 서둘러 발표하고 이런 입장 표명한 것은 오는 12일로 예정된 북미정상회담을 미루지 않겠다는 의지도 읽힌다.

전에 볼 수 없었던 북한의 이런 '공손한 태도' 변화는 북한의 미래를 위해 북미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지난달 2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기존 '핵·경제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총력 집중'으로 노선 전환을 선언하고 비핵화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체제전환에 성공한 나라들의 첫걸음이 미국과 관계개선이었던 사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반세기가 넘게 미국과 대결해온 북한 입장에서는 항상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미국에 대한 불신이 심해 돌다리를 두드리며 건너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자존심을 지키고 미국에 속지 않기 위해 나름 반발을 하지만 비핵화를 통해 미국과 관계개선을 이뤄 경제성장을 달성하려는 의지는 강하다는 게 최근 북측 관계자들을 접촉한 인사들의 전언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번 김계관 발표 이후에도 남북 및 북미 접촉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북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총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북한이 이번에 상당히 굽히고 들어간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마음이 바뀌면 나오라고 했는데, '나는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잘해보자'는 식으로 좋게 메시지를 보낸 것 같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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