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27) 에필로그

지난 3월 10일 진해에서 시작한 '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를 9월 1일 함양에서 맺었습니다. 매주 한 번 도내 18개 시·군에 산재해 있는 잊혀가는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26차례에 걸쳐 소개했습니다.

이 기획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경험에서 시작됐습니다. 전국을 돌며 답사나 역사기행을 다니다 보면 고대, 중세, 근세 유적은 보존과 복원이 매우 잘 되어 있으나 근·현대 역사 현장은 그렇지 못한 점을 느끼게 됩니다. 항일독립운동 현장 역시 허허벌판이 되었거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새로 지어진 신식 건축물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한말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현장이었으나 이제 그 흔적이 모두 사라진 장소에서 이 역사를 기억하는 작은 표지나 비석이라도 세우자는 생각을 담았습니다.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 상당수 항일독립운동 사적이 사라지거나 보존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장소가 한말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거나 그 중심에 섰던 독립운동가가 살아 숨쉬던 역사 현장이라는 것을 알리는 작은 표지마저 없는 곳이 많습니다, 이들 현장을 찾아내 보존하고 후대에 알릴 수 있는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숨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현재를 조명해 앞으로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3월 3일 자에 쓴 '프롤로그' 중 한 구절입니다.

이 고민과 경험을 그동안 독자 여러분과 충분히 공유했는지 스스로 의문을 던져봅니다. 에필로그에는 그간 밝히지 못한 현재적 고민과 기사에 깊이 담지 못한 제언을 덧붙이려 합니다.

하동은 항일독립운동을 기억하는 현장으로서 모범적인 곳이다. 하동항일운동기념탑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사라져간 현장 = 먼저 더 이전 과거에 짓눌린 항일독립운동 현장이 생각납니다. 이들 현장은 대개 사람이 많이 살거나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한말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그 지역 중심부로 기능을 한 곳도 많습니다. 이곳은 고대와 중세, 근세를 아우르는 시간 흐름 속에 한 공간에 중요한 역사적 흔적도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항일독립운동 흔적도 그중 하나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항일독립운동 관련 기억 장치는 그 이전 역사보다 홀대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진주 평안동 롯데인벤스 아파트 자리는 조선조 진주 객사 자리입니다. 이곳에서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듬해 일본은 이곳을 재판소로 활용했는데 수많은 독립투사가 일제 재판관 앞에서 형을 선고받는 모습이 선합니다.

이 맞은편 갤러리아백화점은 조선조 향청 터입니다. 이곳은 대한제국기 경남을 수비할 목적의 지방 군대인 진주진위대로 쓰였는데, 군대 해산 이후 들고 일어난 후기의병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후에는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가 들어서는데, 이 학교는 일제 탄압에 맞서 진주지역 학교 동맹휴학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는 진주 객사, 향청 터임을 알리는 표지만 있을 뿐 항일독립 역사에 관한 표지석이나 비석이 없습니다. 진주성 내 영남포정사에서는 3·1운동이, 그 뒤편 선화당 터는 노응규 의진이 이끈 전기의병 집결지이나 조선조 임진왜란 역사에 묻혀 기억의 힘을 쓰지 못하는 점은 아쉽습니다. 이 같은 안타까움은 조선조 삼도수군통제영에 일제강점기 통영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역사가 묻힌 통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잘못 기록된 기억 = 기억의 방향이 잘못 정해진 사례도 떠오릅니다. 진해 웅천초등학교와 진주 경남과학기술대학교는 각각 지역 선각자와 유림이 힘을 모아 세운 학교였습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민족 교육을 받고 일본에 저항하는 힘을 길렀습니다. 이 학교들은 그럼에도 학교 연원을 일제하 일본이 근대교육을 장악한 시기부터로 두고 있습니다.

진해 웅천초등학교 내 역사기념관에 일본인이 초대 교장이라며 그 사진을 큼지막하게 전시해둔 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한말 개화기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쓴 주기효 선생 관련 내용은 간략하게 기록해둬 더욱 그렇습니다. 진주 경남과기대도 한말 유능한 유생을 선발해 독서와 학술연구에 힘쓰게 한 관립 서재인 낙육재(1896년 설립)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이 반일구국운동 거점화됨을 두려워 한 일제는 학교를 강제로 진주공립실업학교(1910)로 바꾸고서 도심에서 먼 농촌지역으로 옮겼습니다. 이렇듯 낙육재를 놓고 보면 경남과기대 개교 100주년은 1996년이 되어야 했음에도 일제에 의해 공립화된 1910년을 연원으로 삼아 지난 2010년에야 개교 100주년 행사를 했습니다. 이 같은 역사 인식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계속되는 열정과 노력도 공존 = 역사를 만드는 일도 그 역사를 기억하는 일도 모두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기획 취재를 하는 동안 잊힌 역사를 발굴하고 그 기억을 되살리려 앞장서 노력해온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은 진해와 마산 일대 항일독립운동 흔적을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이 지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친일과 독재를 배척하는 올곧은 역사관은 기획 전체 정신적 방향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고명천 마산역사문화유산보존회 회장은 원동무역에서부터 창신학교에 이르는 마산지역 사회, 학생운동 전반에 전혀 알지 못하는 각종 에피소드를 친절하게 전해주시어 기사를 보다 풍요롭게 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고 알리는 일이라면 언제든 찾아오라"며 각종 도움을 주신 추경화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의 힘이 되는 한 마디도 기억이 납니다. 서부경남을 중심으로 한 한말 의병의 투쟁상과 이를 기억하고 선양하는 데 온 힘을 쏟는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의 치열한 사료 연구와 활발한 대외 활동 덕에 각종 자료를 찾고 수집하는 데 어려움을 덜 수 있었습니다. 김의부 거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덕에 일본이 군사기지, 요새화한 거제 내 구석구석 남은 일제탄압·통치기구 흔적을 모두 찾아 자료화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진해청년회사무소 터에 들어선 세탁소 주인어른의 너털웃음이 유독 기억이 납니다. 이곳이 진해 항일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일본 탄압에 맞서 각종 운동을 모의한 곳이라 하니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작은 표지라도 세워 기억을 해야지 그냥 둬서 되겠느냐"며 "표지판을 세울라치면 언제든 공간을 내줄 수 있다. 나라에서 그런 일 하는데 돈 아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취재 초반 더 큰 힘을 내게 한 원동력이었던 셈입니다.

◇보람 있었지만 숙제도 많아 = 반년이 넘는 기간 기사를 이어오다 보니 즐거운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기사가 나간 이후 왜곡된 역사적 기억을 바로 잡고,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지자체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거제 취재 과정에서 김의부 소장께서 던진 지역 내 역사적 의제 중 중요한 화두는 아주지역 3·1항일독립운동 시위일 비정(比定)이었습니다. 기념행사를 주최하는 단체는 시위가 1919년 음력 4월 3일 일어났으니 양력으로 5월 2일을 주장하며 매년 이날을 기해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기획 기사는 이미 대한제국기 을미개혁(1895) 때 양력제가 도입됐고,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적으로 이 제도가 시행 중이었음을 밝혀 알렸습니다. 이 덕분에 거제시는 매년 5월 2일 열리던 관련 행사를 내년부터 4월 3일로 옮겨 치르기로 했습니다.

진주지역 사회운동과 청년운동 현장 취재 보도가 나간 후 진주시 한 공무원으로부터 기사 내용을 참고해 이 일대 어린이·청소년 답사 코스를 만드는 데 참고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 기획 쓰임새가 가장 두드러진 곳은 김해였습니다. 지난 7월 김해지역 취재 보도가 나간 후 김해시와 동상동주민자치센터는 광복절을 맞아 김해지역 최초 3·1항일독립만세운동을 벌인 애국지사 배동석 선생 생가 자리에 이를 알리는 표지판을 제작해 부착했습니다. 지금은 외국인 거리이자 휴대전화 대리점이 돼 버린 이곳에 관련 표지판이 생김으로써 김해시민은 물론 이곳을 지나는 외국인들 모두 우리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한 계기가 됐습니다. 이번 기획은 이렇게 끝이 나지만 이 내용을 참고 삼아 김해 한 곳이 끝이 아니라 경남 전역에 이런 사례가 앞으로 계속 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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