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25) 산청지역 항일운동

지난 6월. 산청군이 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에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진주, 하동 등 서부경남지역 향토사 연구와 미발굴 독립운동가 서훈 신청에 힘써 온 향토사학자 추경화 씨가 군청 앞 공원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나선 것이다.

"산청이 항일독립운동의 고장임에도 이를 기리는 사업에 들어가는 군 예산이 1년에 고작 100만 원이다. 인근 하동군 30억 원, 함양군 33억 원과 극심한 차이가 난다."

추 씨 말대로 산청은 항일독립운동 고장이다. 준엄한 산세와 넉넉한 물을 가진 하천은 곧은 선비 정신과 역동적인 민중 의식을 발현케 했다.

전자의 영향으로 김황 등 이 지역 유림의 어른들은 인근 지역 유림과 함께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했다. 후자는 한말과 일제 초기 의병항쟁이 대표적이다.

특히 민용호는 관동창의대장으로 경남을 넘어 경기도, 강원도, 만주까지 그 활동 범위를 넓혀 간 한말구국의병 핵심 중 핵심 인물이었다.

민용호 관동창의대장이 살던 집. /김두천 기자

산청에 가득한 한말 의병의 혼

험준한 지리산 산세를 낀 산청은 이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해 일본과 결사 항전한 한말 의병을 다수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동의(1867∼1908) 경남창의대장과 민용호(1869∼1922) 관동창의대장이다.

박 대장은 신안면 진태마을 출신으로 지리산 일대를 넘나들며 유격전을 벌이며 수차례 전투를 치렀다. 민 대장은 오부면 오곡리 출신으로 금서면 특리에서 주로 생활했다.

경남과 강원지역 의병들을 이끈 대장들이 산청에서 나고 자란 점은 현재 이 지역 사람들로서는 널리 알릴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 대장은 지리산 전역을 중심으로 산청 덕산과 대원사, 벽계암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여 큰 타격을 줬다. 이들은 1908년 3월 산청주재소와 산청군청 사령실에 불을 놓고 4월에는 단성 순사주재소를 습격했다. 8월에는 대원사 부근에서 일본 토벌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대원사(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2번지)는 의병 근거지로 자주 활용되면서 일본 토벌대의 작전지역으로도 이용됐다.

이때 교전에서 박 대장 의병진 50여 명은 일본 경찰 다수에게 총상을 입혀 격퇴했다.

민 대장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경기도 여주에서 거병한 이후 원주, 평창, 진주 등을 거쳐 1896년 1월 강릉을 점령했다. 이곳에서 관동구군도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장에 추대됐다. 그해 3월 개항장인 원산 공격에 실패했으나 6월 고성과 양양 등지를 점령했다. 의병토벌과 고종의 해산령으로 한계를 느낀 그는 서간도로 향하기도 했다. 이듬해 고종의 부름에 관직에 잠시 몸담았으나 을사늑약 체결 이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해 여생을 보냈다.

금서면 특리(1033-2번지)에는 민 대장이 살던 집이 남아 있다. 현재 거주자가 여러 차례 증축해 옛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일부 당시 모습이 남아있다.

치열한 민중투쟁 산청 3·1운동

산청 신등면과 단성면 3·1항일독립만세운동은 서부경남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치열한 만세 운동으로 기록된다.

1919년 3월 19일부터 22일에 걸쳐 이어진 운동은 신등면 단계리 단계장터(현 단계리 681번지 일대)에서 시작됐다. 신등면 평지리 김영숙 선생은 고종황제 국상을 보고 돌아온 아들 김상준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제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제자 정태륜 선생에게 활동 책임을 맡긴 그는 각 마을을 다니며 함께할 사람을 모았는데 이것이 사전 발각돼 제대로 된 시위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동 인물들이 헌병에게 붙잡혀가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이 호응해 만세 물결이 일었는데 이때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 일로 김상준·김기갑·김동민·윤치현·정현숙 선생 등이 검거됐다. 이 실패 이후 정태륜·권숙린·김선림·김상문 선생 등은 20일 단계장터, 21일 단성면 성내리 장터에서 재의거를 계획했다. 20일 시위는 단계장터에 모여 단성면 성내리로 이동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이때 600~700여 명 군중이 모였다. 이동 중 합세한 군중까지 모두 1000여 명이 성내리 장터에 모이자 일본헌병대는 구금자 5명을 석방하는 대신 군중 해산을 요구했다. 주도 인물들은 이를 거절하고 밤늦도록 만세운동을 펼쳤다. 일본은 무력진압에 나서 주동자 29명을 검거했다.

1919년 3월 2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당시 단성공립보통학교 자리. /김두천 기자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진압에 이튿날 단성면민 분노가 폭발했다. 마침 21일은 단성 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전날 단계에서 성내리 장터로 온 시위인파와 함께 장날을 맞아 이곳에 온 인파가 합세해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다. 본래 객사 터였던 당시 단성공립보통학교(단성면 성내리 596-2번지 일대) 정면 삼거리는 주재소와 장터와 인접한 중심가였다. 오전 11시께 군중은 이곳에서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이와 함께 이호용 선생 등 대표단 4∼5명은 단계시위에서 검거된 이들의 석방·인도 교섭을 했다. 그러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오후 3시를 기해 헌병과 대치하던 군중이 "구금자 석방"을 외치며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는 등 행위로 경계선을 뚫었다. 이들이 헌병주재소 정문까지 진출하자 일본 헌병들은 총을 쐈고 수십 명이 맞아 사망하기에 이른다.

저항 불꽃은 산청면 산청장터(산청읍 산청리 171-2번지 농협중앙회 자리)에서도 피어올랐다.

옥동에 살던 일본 동경 유학생 오명진이 귀국 후 독립선언서를 구해 구두 밑창에 숨겨 귀향한 뒤 색동 수계정에서 동지를 규합하면서다. 이 지역 후대인들은 이를 '산청결사대'라 칭하는데 이들은 의거일을 3월 22일로 정하고 산청면사무소 등사기를 이용해 선언서, 결의문, 태극기 1500여 장을 인쇄한다.

이들은 산청군수 홍승균에게 동참을 요구하며 독립선언서 1000장을 전했으나 되레 군수로부터 밀고를 당해 21일 주도 인물 3명이 검거되고 집이 수색당한다.

이 시련에도 의거 소식은 이미 널리 전파된 터라 22일 산청장날 이름 모를 한 사람 주도로 항일독립만세 외침이 울려 퍼졌다. 헌병대는 총칼로 무력 진압했고 민치방 선생 등이 부상을 당하고 주도 인물들은 모두 검거됐다. 옛 산청장터 주변에 대로가 생기는 바람에 그때 당시 모습은 사라지고 크기도 축소돼 안타까움이 남는다.

22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산청장터 자리. /김두천 기자

3·1정신 세계에 알리려 한 김황

거창 유림 곽종석(郭鍾錫·1846~1919) 선생과 윤충하(尹忠夏) 선생, 김창숙 선생 등 유림은 3·1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독립요구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한다. 이것이 '파리장서운동'이다.

곽종석 문하에 있던 김황(金榥·1896~1978)은 산청군 신등면 상법리(현 차황면 상법리 335번지)에 살았는데 스승의 명을 받들어 진주·산청·삼가 등지 유림을 찾아가 파리장서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김창숙 선생이 이 장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떠난 뒤 일본 경찰에 발각된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김황 선생을 비롯해 여러 유림이 옥고를 치렀다.

김황 선생은 1926년 상하이에 있던 김창숙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려 비밀리 입국했을 때도 유림 조직을 이용해 모금 활동에 적극 나섰다가 '제2차 유림단 사건'으로 또 한 번 9개월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말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상투를 끝까지 자르지 않는 등 전통 유림 모습을 간직했으며 자녀도 식민교육기관에 보내지 않을 정도로 강직했다.

선생이 강학한 신등면 평지리 내당촌 내당서사(內塘書舍)는 전국 유림의 중심지로 이름을 알렸다. 신등면 일대는 김황 선생이 살던 집과 내당서사 등 여러 사적지가 있는 만큼 연계 답사를 추진해볼 수도 있겠다.

이렇듯 산청은 항일독립운동에서 많은 역사문화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이를 제대로 기념하고 계승하는 작업이 더딘 것은 분명히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들이 잘 아는 조선시대 류의태와 허준이라는 굵직한 스토리에 항일독립운동 역사가 가려진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모쪼록 산청이 한방의약과 함께 항일독립운동 중심으로도 그 이름을 떨칠 수 있도록 민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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