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2) 통영별로 28회차

오늘은 경상도 사나이 이몽룡과 전라도 아가씨 성춘향의 로맨스로 유명한 전라북도 남원 성내의 광한루원에서 길을 잡아 나섭니다. 사실 그날 남원부성에 들었을 때는 해가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가 버린 시간이었지만, 글 순서에 맞추다보니 이곳이 출발지점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뭉친 우리 가족으로 꾸린 단란한 나들이가 되었습니다. 성 밖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남원부성 동쪽을 흐르는 요천을 따라 길을 잡아 나섭니다.

◇요천을 거슬러 오르다

광한루가 있는 이곳의 이름은 쌍교동인데, 바로 성 밖 요천에 둔 두 개의 삽다리(흙다리)에서 비롯됐습니다. 삽다리가 있던 곳은 광한루원 동쪽으로 지금의 관광단지 부근이 되는데, 요즘은 춘향제 기간에 두 삽다리를 재현하여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광한루 동쪽으로 나온 길과 마주하는 곳이 요천인데, 지금은 섬진강으로 이르는 물이 그리 성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이곳까지 소금배가 올라 왔다고 합니다. 요천(蓼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산천에 '부의 동남쪽 1리에 있는데, 시내 가운데에 바위가 있어 모양이 소와 같으므로 우암(牛岩)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 바위는 동림교 아래쪽 냇가에 있는 눈(누운)소바위를 이릅니다. 바로 이즈음이 숲재이인데, 예전에는 이곳에 풍치림으로 조성한 큰 숲이 있었기에 이런 이름이 남았습니다.

광한루원 요천가를 따라 걷는 통영별로

오늘 첫 구간은 요천 가에 조성한 산책로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오르니 감각을 자연에 집중할 수 있어 좋습니다. 벌써 한 달이 더 지난 시점이지만, 그때 둔치에는 버들강아지가 물이 올라 있고, 북녘으로 돌아가지 않은 물새들이 한가롭게 먹이를 찾아 물 속을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동도역을 지나다

물새들이 자맥질하던 곳을 지나 백암천이 요천으로 드는 즈음에 조금 못 미친 곳은 도통동(道通洞)인데 그 이름이 엄청나서 찾아봤더니, 동도리와 통기리를 합친 이름이라고 합니다. 동도리는 옛 동도역에서 비롯됐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역원에 '동도역(東道驛)은 부의 동쪽 7리에 있다'고 전합니다. <한국지명총람>에 동도는 도통의 동쪽이라 했으니 역이 있던 자리는 아마 지금의 '역들'과 도통마을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약간 위쪽의 고죽동으로 옮겨갔다고 전해집니다. 이곳 고죽동에 있는 누른대 황죽(黃竹)은 간신으로 알려져 있는 유자광(柳子光:?~1512)이 태어날 때 대가 누렇게 변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만, 어찌 인과관계가 그리 성립되었을까요. 아마 그의 훗날 행적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됐지 싶습니다.

예전에는 이곳 동도에서 죽항 쌍교 천거에 이르는 요천 가에 돌로 둑을 쌓고 임수(林藪:나무가 우거져 있는, 풍수 비보·풍치 조성·홍수 예방 등을 위해 조성한 숲)를 두어 요천 물이 남원부성으로 들이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산천에 나오는 동장수(東帳藪)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에는 '부의 동쪽 7리에 있다'고 했으니 동도역이 있던 데서 요천을 따라 숲재이를 거쳐 광한루 남쪽의 율림(栗林)까지 이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 조사 보고한 <조선의 임수>에는 그 길이를 약 3㎞라 했고, 상류의 동도와 죽항 사이 1.5㎞ 구간에는 주로 팽나무·왕버들·서어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울창했던 그 숲의 자취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의병장 산서 조경남(山西 趙慶男:1570~1641)이 지은 <난중잡록>을 보면, 이 일대는 임진왜란 때 임실 방면에서 내려오던 왜병과 우리 의병이 서로 쫓고 쫓기던 전장이 형성된 곳으로 그들의 동선은 통영별로와 같은 임실-남원-축천정-동도역-운봉-여원치입니다. 그런데 2002년에 나온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의 비밀>이란 책에는 <춘향전>의 작가가 <난중잡록>을 남긴 조경남(1570~1641)이라 밝히고 있어 주목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도령의 모델은 남원부사로 재직한 성안의의 아들 성이성이며, 그는 암행어사로 1639년과 1647년 두 차례 남원을 찾았다는 사실이 <호남암행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조경남이 당시 설화로 전해 내려오던 기생 이야기와 젊은 암행어사 성이성을 접목해 <춘향전>을 창작한 것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또한 조경남이 <속잡록>에 실은 시 '금준미주(金樽美酒)'가 <춘향전>의 '암행어사시'와 같은 것도 그를 춘향전의 원작자로 볼 수 있는 근거라는 얘기지요. 결국 조경남이 지은 <원춘향전>(1640)은 이도령 중심이었으나 18세기에는 춘향 중심으로 바뀌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도령-춘향 중심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입니다.

동도역이 있었던 역들을 지나 월락삼거리에서 요천과 헤어져 백암천을 따라 운봉으로 향합니다. 사실 이곳에서는 약간 혼란이 있었습니다. 삼거리에서 곧장 요천을 따라갈 뻔했거든요. 봄날이라 그런지 자주 링반데룽(환상방황)을 경험합니다. 결국 삼거리에 있는 가게에 들러 맥주 한 캔으로 원기를 보충하며 주인장 아주머니께 길을 물어 바른 길로 듭니다. 늘 경험하는 바이지만, 지도를 읽다 헷갈릴 때는 언제든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최고지요.

   

◇동쪽으로 길을 잡다

이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니 통영별로는 본격적으로 우리 경남으로 향합니다. 이백교를 건너 이백면으로 접어드니 옛길의 북쪽에 척문산성과 고분군이 있습니다. 성이 있는 마을 이름이 척동(尺洞)인 것은 이곳에 성이 있기 때문인데, 성의 우리말이 '재'이니 그것을 이르기 위해 재의 변이형인 '자'를 훈차하기 위해 자 척(尺)을 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고장의 자산성에서 성을 이르는 자(玆)를 음차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을의 이름이 척문(尺門)이 된 것은 도통리와 마찬가지로 척동과 폐문을 합쳤기 때문인데, 폐문(閉門)이 척동의 서남쪽에 있었음은 이 성이 남원에서 여원치로 향하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잣골 동쪽 들을 성들이라 하고, 고분군이 있는 곳은 가장골이라 했으니 땅이름이 이 일대에 성과 고분이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구간에서 옛길은 백암천 북쪽 기슭을 따라 난 이백로가 덮어쓰고 있어 우리는 농로로 쓰이는 호젓한 남쪽 기슭의 둑길을 따라 걷습니다. 오랜만에 함께한 모자는 나란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는 모습이 보기에 좋습니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그때 보았던 천변 풍경은 많이 변했겠지만 그들의 추억은 변치 않고 가슴에 남았겠지요. 척문리를 지나며 길이 남동쪽으로 살짝 꺾이는 곳에 있는 초촌리에도 오동(자라올)마을을 사이에 둔 동서쪽 구릉에 삼국시대의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곳 초촌리고분군(전북도기념물 제47호)은 전주시립박물관에서 분포 측량과 발굴 조사를 수행하였는데,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60호 돌방무덤에서는 다양한 토기와 철제무기를 비롯하여 금귀고리 등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응령역을 지나치다

초촌리와 백암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서곡리에는 문화마을이 단정하게 조성되어 있고, 서곡리를 지나면 효기천이 백암천에 드는 삼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내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없어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정면 돌파하기로 작정하고 어렵사리 내를 건넜습니다. 내를 건넌 곳이 삼거리(三巨里)인데, 이곳 둔치에서 아내가 청자와 기와의 조각을 발견하고, "이거 유물 아니야?" 하고 묻습니다. 물론 맞고요. 그것이 효기천 상류에서 떠내려 온 것이니, 그때 청자와 기와가 우리를 자기 집으로 맞으러 나온 것임을 알아차렸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사진만 남기고 곧장 이백면 소재지가 있는 과립리로 길을 잡아 버렸습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이즈음에 응령역이 있음을 파악하고 나섰음에도 길의 방향성을 여원재에 두고 도로의 경제학 운운하며 곧은길을 택한다는 것이 이런 실수를 빚은 것입니다. 여전히 삶은 실수투성이입니다.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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