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것 제쳐놓고 굳이 먼저 들췄던 것들 묘사만으로 충분했던 지역

거창에서는 이 땅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매력을 제쳐놓고 굳이 '거창사건 추모공원'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민간인 학살, 나라가 저지른 이 씻을 수 없는 죄는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경남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경남의 재발견'을 취재하며 이 내용을 반드시 다루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하겠다면 다른 지역보다 거창이 낫겠다고 여겼습니다. 거창은 그나마 나라에서 죄를 일찍 인정하고 고개를 숙인 지역입니다. 잘 정돈된 묘역을 거닐며 먼저 눈에 띈 것은 육면체 윗면과 앞면을 사선으로 깎은 검은 비석이었습니다. 그리고 묘비에 새긴 제각각인 태어날 날짜와 똑같은 죽은 날짜. 이를 그대로 옮기는 것만으로 비극을 전하기는 충분하다 여겼습니다.

합천 이야기는 땅 이름 풀이부터 시작합니다. 합천(陜川)은 한자 그대로 읽으면 '협천'입니다. 곳곳에 솟은 산과 그 사이 좁은 계곡을 보면 '좁은 내'라는 이름은 땅 모양새와 맞아떨어집니다. 협천을 합천으로 부른 것은 1914년 협천군·초계군·삼가현이 묶이면서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세 개 고을을 합하였으니 협(陜)보다 합(合)이 맞다'며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한자는 그대로 쓰되 '합천'이라고 읽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같은 이름 풀이를 옮긴 까닭은 이 땅이 경남에서 가장 면적이 넓어서였습니다. '좁다(陜)'라는 글자를 기어이 '더했다(合)'고 읽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물섬'이라는 별명답게 자랑할 게 많은 남해에서는 굳이 양아리 벽련마을에서 갈 수 있는 섬 '노도'를 먼저 찾았습니다. 남해는 너른 들판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섬을 둘러싼 바다에서도 큰 수확을 얻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 탓을 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살림을 꾸렸습니다. 오늘날 남해에 넘치는 자산은 부족한 것을 채워나갔던 억척스런 사람들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가진 게 없었기에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셈입니다. 노도는 김만중(1637~1692)이 유배됐던 곳입니다. 왕에게 미움받은 선비는 살림도 마음도 가난했으나 우리 문학사에서 손꼽는 귀한 자산을 만들어냅니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갖게 된 남해와 옛 어른을 노도에서 묶을 수 있었습니다.

거제에서 가장 이른 아침을 맞는 곳은 항구와 조선소입니다. 거제는 경남에서 국가어항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그리고 경남은 물론 나라에서 꼽는 거대 조선소가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어업과 조선업은 거제는 물론 경남 살림을 살찌우는 산업입니다. 거제 곳곳에 있는 해수욕장, 해금강으로 대표되는 섬 풍경을 제쳐놓고 장목면 외포항과 조선소 인근 지역 출·퇴근 풍경을 한 번에 묶어 정리한 이유입니다.

   

진주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진주 정신'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과 땅 곳곳에 서린 역사 이야기만 모아도 차고 넘칠 것 같은 이곳에서 보이지도 않는 '진주 정신'을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습니다. 결국 넉넉한 살림, 예부터 풍족하게 누렸던 고급문화, 굽히지 않는 자존심 등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상당히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진주가 나라 안에서 경주 다음으로 본관이 많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대곡면 단곡리 진양 하씨 집성촌에서 넉넉한 살림 밑천이 됐던 들판과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들이 움켜쥔 자존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유난스러운 '진주 정신'은 생각보다 매우 뿌리가 깊습니다.

   

김해에서 예부터 유명한 그 들판은 높이 382m 분산에서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나지막한 산 정상에서 김해 도심과 들판은 눈에 걸리는 것 없이 펼쳐졌습니다. '김해 흉년 들면 경남이 굶는다'는 옛말에 허세는 없습니다. 김해는 누가 뭐라 해도 평야입니다. 서부 산간지역과 견주면 보잘것없는 산세를 품은 이 땅은 그 덕에 어디보다 넉넉한 들판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김해 이야기는 당연히 들판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함안에서는 나라에서 가장 길다는 '둑방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둑은 함안 가야읍과 법수면에 펼쳐진 넓고 고른 들판을 낳은 어미 같은 존재였습니다. 더불어 둑길은 여기 사람들은 물론 바깥사람들도 즐겨 찾는 훌륭한 산책로이기도 했습니다.

둑과 강 사이 곳곳에 만들어진 벌은 사람에게 보기 좋고 짐승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여기 사람들이 자랑하는 '악양루 석양, 반구정 일출'이라는 절경 역시 그 배경은 둑길이 됩니다. 둑길을 산책하듯 그 생김새를 묘사하는 것만으로 함안 이야기를 시작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하동은 경남이 유난히 편애한 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리산, 섬진강, 한려수도, 평사리 들판 등 한 가지만 지녀도 그럴듯한 자산은 하동 울타리 안에 모두 있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어지간해서는 다른 고장 생김새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땅 생김새만 풀어놓아도 하동이 지닌 매력은 쉽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동뿐 아니라 경남 것이기도 한 지리산·한려수도를 빼더라도 남는 섬진강. 빼어난 하동 풍경 이야기는 바로 섬진강으로 이어집니다.

   

진해와 창원(의창·성산구)은 사람 머릿속에서 나온 도시입니다. 진해는 1910년 일본이, 창원은 1970년대 이 나라 정부에서 만들었습니다. 진해와 창원이 계획도시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풍경을 찾기에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진해는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서북쪽에 있는 북원로터리, 남쪽의 남원로터리가 시가지 중심입니다. 이 3개 로터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도로 사이에 들어선 주택과 상가는 격자형으로 반듯하게 정돈돼 있습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흠잡을 게 별로 없는 시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시가지는 근·현대 도시 맵시를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곳과 달리 진해 매력은 일상에 널린 풍경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계획도시 창원 이야기는 '창원대로'에서 시작합니다. 나라 안에서 가장 긴 일직선 도로는 도시를 만들 때 애초에 길을 먼저 닦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모양입니다. 창원대로 하나만 봐도 창원시 정체성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더불어 나라 안에서 가장 넓다는 원형 광장인 '창원광장' 역시 면밀한 계획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창원대로와 창원광장을 묶으면서 계획도시 창원 이야기 실타래를 풀었습니다.

   

이제 '경남의 재발견'을 통한 경남 이야기를 마칩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경남이 지닌 매력을 두루 짚기에는 또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경남의 재발견'이 경남에 더 가깝게 다가서려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길 감히 바랍니다. 가까워서 몰랐던 매력을 다시 볼 수 있어도 좋습니다. '경남의 재발견'이 놓친 것을 볼 때마다 핀잔을 줘도 좋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놓은 결과물이 바라는 쓰임새가 그렇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저 지역마다 그곳에 대한 애정이 넘치지 않고서는 찾아낼 수 없는 매력을 전해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경남의 재발견' 구성을 거드는 훌륭한 길잡이였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온·오프라인을 통해 제보·조언해주신 분들도 많습니다. 덕분에 깜냥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과분한 관심과 응원 또한 고맙습니다. 긴 시간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경남의 재발견' 마지막 편인 창원 의창·성산구 이야기에서 끝 문장은 이렇습니다.

'결국 사람이다'.

   

통합 창원시가 풀어야 할 과제로 쓴 말이지만 '경남의 재발견' 취재 내내 새겼던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있었기에 낯선 땅이 더욱 살가울 수 있었습니다. 지역이 갖춘 자산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를 찾아내고 가꾸는 것도 사람이었습니다. 경남이 지닌 가장 큰 자산은 경남 사람인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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