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피해 국가 책임은 동일…소멸시효 기준 다르게 적용소멸시효 지났어도 법령 마련 등 조치 주문

지난 10일 울산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은 육군 정보국(CIC) 소속 군인과 울산경찰서 사찰계 경찰관들의 행위가 명백한 '불법'이었음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사건 이후 그 사실을 은폐하고 적법하다고 주장해온 국가의 행위 또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11일 시효 문제로 유족들의 소송을 기각한 같은 법원의 판결 또한 비록 국가배상법상의 손해배상은 물을 수 없다 하더라도 관련 법령을 마련하는 등 별도의 조치로 유족의 피해 회복을 시켜줘야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역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경남도민일보는 두 재판의 판결문을 입수해 왜 이런 상반된 판결이 나오게 됐는지를 비교했다.

◇울산보도연맹 사건 = 국민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가 좌익 관련자들을 전향시키고, 전향자들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설립단체였다. 대외적으로는 좌익전향자 단체임을 표방했지만, 보도연맹의 총재는 내무부장관이, 고문은 법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이 맡았고, 검찰과 경찰 간부들이 하부 지도위원장 또는 지도위원을 맡아 조직을 관리하던 단체였다. 또한 각 지역별로 인원수를 할당함으로써 좌익활동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까지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킨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가운데 1949년 11월 13일 보도연맹 경남도연맹 발기대회가 열렸고, 11월 20일 선포대회가 있었다. 이후 시·군연맹과 읍·면지부도 1950년 2월까지 대부분 결성됐는데, 그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석윤 내무부 치안국장은 전국 각 도의 경찰국장에게 요시찰인과 보도연맹원 등을 즉시 구속할 것을 지시했고, 헌병사령관 송요찬은 그해 7월 20일 계엄지역에서는 예방구금을 할 수 있다는 체포·구금 특별조치령을 발령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요시찰인과 형무소 재소자, 보도연맹원들이 군경에 의해 불법 처형됐고, 이 과정에서 경남의 각 시·군에서도 수많은 민간인이 바다와 산골짜기에서 학살됐다. 울산에서도 이렇게 학살돼 1960년 4·19 혁명 이후 발굴된 유골만 829구에 달했다. 유족들은 당시 합동묘를 만들고 추모비를 세웠지만,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합동묘까지 해체해버렸다.

또한 마산의 노현섭 유족회장 등 전국유족회 간부들은 '적을 이롭게 했다'는 명목으로 사형 또는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는 등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국가가 철저히 차단했다.

재판부는 이런 국가의 은폐 및 진상규명 방해행위를 인정했다. 이번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국가는 "원고들이 적어도 1960년 8월 21일 유해발굴 당시에는 사건으로 인한 손해 및 그 가해자를 알았다고 할 것이므로 위자료 청구권은 유해발굴 당시로부터 3년 후인 1963년에 시효로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국가는 또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5년이 경과한 1955년 시효는 소멸했고, 이번 소송은 2008년 제기되었으므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채무자(국가)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유족)의 권리 행사나 시효 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거나, 일단 시효 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와 같이 신뢰하게 한 경우에는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 남용"이라고 판시했다.

즉 국가가 유족의 진상규명 요구를 방해 또는 외면해놓고, 이제 와서 시효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뜻이다.

11일 국가 상대 손배소송에서 패소한 채의진 문경유족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재판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김주완 기자
◇문경 석달동 학살사건 = 문경 사건은 1949년 육군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와 3소대 군인들이 공비토벌을 빙자해 석달마을 주민 127명 중 어린이와 노인 등 88명을 학살한 후, '공비가 저지른 만행'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보도연맹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불법행위임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고, 진실화해위도 2007년 6월 "국군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어떠한 선별절차나 법적 근거 없이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으로 명백한 위법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유족들이 국가기관에 진실규명을 지속적으로 요청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유족들 자신은 문경학살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고, 또한 유족들이 2000년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한 점을 종합하여 볼 때 피고(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이 현저히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에 대해 채의진 유족회장은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채 회장은 "2000년 국가가 제대로 의무를 하지 않는다며 헌법소원을 낸 것이 소멸시효 완성의 근거로 제시됐다는 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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