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는 세계 인권운동 사상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행사가 열렸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이 바로 그것. 전 세계의 인권·평화·여성운동가 1000여명과 인권운동에 앞장서온 법률가, 남·북한과 대만·인도네시아·필리핀·동티모르 등 8개국의 위안부 출신 할머니 등이 참석한 이 국제법정은 12일 낮 12시 15분 일왕 히로히토 등 8명의 전범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경남에서는 유일하게 이번 국제법정에 증인으로 참석하고 돌아온 정서운(79·진해시 자은동)할머니를 만났다.
“비록 법적 구속력이 없는 민간법정이긴 하지만 우리 힘으로 천황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걸 보니 50년 통한이 반분이나마 풀리는 것 같아. 근데 왜 경남에서는 나 말고 아무도 안왔는지 몰라. 경북서도 오고 부산서도 오고, 전국에서 안온 데가 없었는데 경남사람만 없더라구.”
할머니는 경남에 관련 시민단체도 있고 여성단체도 있는데 10년 ‘위안부 운동’의 총 결산이었던 이번 법정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게 못내 아쉬운 듯 했다.
기자가 “여비를 마련하지 못해 참석을 못했다”고 설명하자 “쯧쯧 그게 문제였구만, 그게 문제야”를 연발하면서도 쉽게 납득이 안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번 공개증언을 해봤고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몇 번이나 증언을 해봤는데, 어찌된 일인지 외국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이 일에 관심이 적은 것 같아. 외국에선 자리가 비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그 반대야. 낮은 목소리 같은 우리 문제를 찍은 영화를 상영해도 미국이나 일본에서 더 많은 관객이 모인다고 하더라구. 이건 뭐가 잘못돼도 상당히 잘못된 것 같아.”
가해국인 일본은 우익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처럼 일본에는 ‘위안부 운동’을 지원하는 시민단체나 여성단체가 의외로 많다.
이번 국제법정을 가해국인 일본의 한복판에서 열자고 제안하여 이를 성사시킨 바우넷(VAWW-NET·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같은 국제단체나 ‘전후책임을 묻는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등이 그것이다.
이들 단체는 이번 국제법정 기간에 일본우익단체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에 시달렸다.
“물론 일본엔 우익단체들도 많지. 법정이 열리고 있는 구단회관 앞에서도 일본 우익단체가 데모를 벌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일본 시민단체들은 그런 일에 흔들리지 않아. 그런 눈치를 볼 것 같으면 아예 이런 운동을 못하는 거지.”
인터뷰 도중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 그래 동생이야· 그래 나도 너무 고마워서 김 열다섯 톳을 사서 어제 일본으로 보냈어. 그래 내 연락할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번 법정에 같이 다녀온 충청도 할매”라고 소개했다.
일본에 김을 보냈다는 건 현지 시민단체 간부인 ‘오오다’라는 여성이 하도 고맙게 해줘 귀국하자마자 답례로 김을 사보냈다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무엇이든 싸주고 싶어하는 한국 할머니들의 후덕한 심성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정서운 할머니에겐 정작 자식이 없다. 자식은커녕 형제나 친척마저 없다.
다만 같은 시기에 일제의 징병에 끌려갔다 돌아온 동병상련의 영감(79)만이 유일한 가족이다.
“내 고향은 하동 악양면이었지. 어머니·아버지, 그리고 나, 이렇게 세식구가 전부였는데 일제가 무기를 만든다고 놋그릇을 다 빼앗아 갔지. 아버진 그걸 안 빼앗기려고 땅에다 놋그릇을 죄다 파묻었는데, 그게 동네사람의 밀고로 들통이 나서 경찰에 잡혀갔던 거야.”
그때 열네살의 소녀였던 할머니는 “니가 일본 군수공장에서 2년반만 고생하면 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는 구장의 꾐에 빠져 정신대 모집에 응했다.
“그런데 구장이 거짓말을 했던게야. 아버지도 풀려나지 못했고 군수공장도 아니었어.”
이 말을 하면서 할머니는 가슴을 꾹꾹 눌렀다. 억장이 막히는 듯 했다.
본 시모노세키의 창고 같은 데서 한달동안 갇혀 있던 할머니는 수많은 처녀들과 함께 큰 배에 실려 대만과 광동·태국·싱가포르·사이공을 거쳐 자카르타의 마랑이라는 곳의 위안소에 배치됐다.
그때부터 짐승보다 못한 생활이 시작됐다. 지금도 할머니의 온 몸에는 칼자국과 담뱃불에 지져진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놈들은 자궁까지 들어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할머니를 비롯한 대부분의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자식을 낳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까지 말한 할머니는 가슴속 깊이 응어리진 한숨을 고통스럽게 토해냈다.
“이제 그만 물어봐. 내 이런 얘기 한번 하고 나면 며칠간을 끙끙 앓게 돼.”
얘기를 돌리려고 종전 후 귀국과정을 물어봤다.
“같은 막사에 있던 13명중 4명은 죽었어. 왜놈 군인들이 증거를 없애려고 방공호에 생매장했지. 4명을 그렇게 죽이고 나머지를 또 생매장하려는 순간 연합군이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만 살아났지. 그후 배가 없어서 연합군 수용소에서 한달을 기다렸다가 겨우 하동에 오니 어머니·아버지는 모두 돌아가고 아무도 없었어.”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던 질문이 또다시 아픈 상처를 건드린 셈이 돼버렸다.
마지막으로 우리 정부에 대한 할머니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전두환·노태우는 말할 것도 없고 김영삼이나 김대중이도 별로 다를 게 없어. 그나마 김대중이는 다른 대통령보다 좀 낫지만 일본에 당당하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아. 내 죽기 전에 왜왕을 진짜 법정에 세우는 걸 봐야 할텐데….”
“난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부끄러운 건 왜놈들이지 왜 우리가 부끄러워야 해·”라는 할머니의 말을 뒤로 하고 임대아파트 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의 컴컴한 4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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