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마다 백성의 거친 한숨이…

밤새 몸을 뒤척였다. ‘우두두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줄기는 거세졌으면 거세졌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음침할 정도의 바람소리도 잠에 어려있는 귓가를 사정없이 때려댄다. 고려 18대왕 의종(1127~1173년)의 슬픈 역사가 묻어 있는 현장, 폐왕성(廢王城·도 기념물 제11호)을 찾아보고 싶었기에 짓궂게 내리는 비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 번 먹은 계획을 중도 포기한다는 것은 내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폐왕성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퍼붓는 비를 감수해야하는 발걸음이 마냥 가벼울 수 만은 없다.
폐왕성은 거제대교를 막 지나면 위치한 둔덕면 거림리 뒷산 우두봉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성의 둘레는 550m에 높이가 5m 정도 된다. 의종이 1170년 상장군 정중부가 주축이 된 무신들의 반란에 쫓겨 3년 동안 폐왕이 되어 살다 간 성이다.
거제 사람들이면 다들 알 것 같은데도 모르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하지만 길을 묻어 묻어 찾는데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 둔덕초등학교 조금 지나 있는 동네 슈퍼 앞에서 좌회전하면 폐왕성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가끔씩 왼쪽으로 가야할지 오른쪽으로 가야할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그냥 곧장 올라가면 된다.
길이 구불구불해서 운전이 서툰 사람에게는 다소 버거울 수도 있겠지만 폐왕성 앞까지 임도가 잘 나있어 어렵잖게 찾아 오를 수 있다. 폐왕성지(廢王城地)라는 입간판 외에는 안내를 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왼편 오른편으로 양갈래 길이 있고 입간판 왼쪽 뒤편으로 성이 보인다고 해서 왼쪽 길로 들어서면 곤란하다. 신나게 내려가 보아도 길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차는 그냥 입간판 주위에 세워두고 오른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성으로 오를 수 있는 작은 길이 나 있다.
입구부터 약 100m 가량만이 복원되어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성벽 길을 거니는 것을 잠시 미뤄두고 성벽 아래로 내려와 본다. 돌 모양도 가지런하고 반듯한 모양이지만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습은 엄청난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많은 돌들을 저 아래 마을에서부터 이곳까지 짊어지고 왔을 이름 모를 백성들의 숭고한 땀을 생각하니 이 산성의 돌덩이 하나하나가 생명을 부여받은 생명체처럼 다가왔다. 또한 그렇게 견고하게 지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부가 뚜렷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비가 내리는 중이지만 잠시 성벽에 귀를 붙이고는 지그시 눈을 감아본다. 돌을 나르는 백성들의 거친 숨소리, 그 백성들을 독려하는 신하들, 그리고 어딘가 구석에서 안타까운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섰을 의종의 뚜렷하지 않은 모습들이 1분 짜리 영화처럼 스쳐지나간다.
성벽 돌담길을 계속 걸어가니 이제부터는 무너진 성벽 때문에 걷기가 영 불편하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보여주듯 짙은 녹색을 띤 이끼가 돌덩이마다 잔뜩 끼어 있어 때마침 내리는 폭우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무너진 성벽은 왕좌에서 쫓겨난 의종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는 듯 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오늘 같은 세찬 비바람에 온 몸을 맡긴 성이 그 잘생긴 형체를 어떻게 간직할 수 있겠는가. 인간도 그러하지만 세월 앞에 무기력하기 만한 성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잠시 느껴본다.
하지만 군데군데 굴러다니는 몽돌에 묻어있는 진한 혈루는 세월의 흐름에도 지워지지 않고 슬픈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한 맺힌 의종의 피눈물이 만들어 낸 숨길 수 없는 역사의 아픔이리니!
성안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쓰러진 고목들로 인해 진입이 불편하다. 남과 북에 성문이 있고, 성안 어딘가에 천지못이라는 의종이 마셨다는 우물이 있다는데 무성한 잡초와 눈앞을 가리는 비 때문에 찾기가 너무 어렵다.
폐왕성에 가보고 싶다며 함께 나선 동생과 눈을 씻고 찾아보았지만 가시덤불에 찔리고 돌에 미끌리고 온 몸은 비에 흠뻑 젖어버렸다. 결국 허탕만 친 셈.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냈던 제단이라도 찾아보려고 북단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이 역시 무너져 내린 것인지, 아니면 수풀에 가려 못 찾은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 때문인지 폐왕성이 더욱 쓸쓸하게 보인다. 또한 그냥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게다가 누구의 묘인지는 몰라도 폐왕성 안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묘지가 하나 있어 순간 맥이 빠져버린다. 모르긴 해도 무성한 잡초와 잡목들을 들춰보면 또 다른 이름 모를 묘지가 많을지도 모른다.
잠시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짙은 구름이 산정에 걸쳐있는 모습이 우울하다. 3년 간의 성지 생활 후 경주에서 복권을 노리던 의종이 결국 이의민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그 날도 오늘처럼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을까? 이 비가 자기의 안타까운 죽음을 호소하는 의종의 뜨거운 눈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왜 일까?
무너져버린 성이 이곳 뿐만은 아닐 진데 뒤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돌려보아야 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또 이런 생각도 든다. 문신들과 방탕한 생활을 했기에 상대적으로 멸시당했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비참한 생활과 최후를 맞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의종 자신이 택한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
더 거세지는 비 때문에 한기까지 든다. 비 때문인지 슬픈 역사의 현장을 택한 선택이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잔뜩 찌푸려져 있는 하늘만이 쓸쓸히 버려져있는 폐왕성을 굽어보고 있다.

▶ 가볼만한 곳
-언덕 완만해 등산하기 좋은 휴양림
-가는 발 부여잡는 유치환선생 생가


폐왕성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400m만 들어가면 <깃발> 등의 작품을 남긴 청마 유치환 선생의 생가가 있다. 현재 생가에 살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관리를 하고 있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곳에서 청마는 푸른 해원과 물결 그리고 백로를 노래했고, 바위와 비와 바람과 구름과 친구가 되곤 했다. <깃발>이나 <바위>와 같은 시를 보면 고향 거제의 푸른 산과 바다가 많이 담겨 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자연휴양림이다. 자연 경관이 수려해 도내 휴양림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해금강 방면으로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가다보면 학동에 도착하기 직전에 휴양림을 만날 수 있다. 동부면 구천리 노자산에 위치한 휴양림은 경사가 완만해 노약자나 어린이에게도 부담이 덜하다. 또 산이 야트막해 정상에 오르기도 쉽고,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은 가슴이 확 트인 시원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휴양림 내에는 각종 부대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등산로와 산책로도 잘 되어 있고 야영장과 방갈로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온 가족이 함께 하루 혹은 이틀간 휴식을 편안하게 취할 수 있다.
하루 6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한데 방갈로는 2인용과 5~8인용, 10~15인용이 있으며 난방·취사·샤워장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또 50여개의 야영터와 36개의 야영데크가 있으며 숲속 수련장과 어린이 놀이터, 물놀이장, 폭포 등이 있어 가족 나들이는 물론 아이들의 자연 체험 학습에도 유익한 곳이다.
그리고 자연휴양림 바로 인근에 있는 거제자연랜드에 들려 보아도 괜찮을 듯 싶다. 자연랜드에는 한국 최대의 난 전시장이 있어 각종 난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또 우리나라 산야의 자생식물은 물론 아열대 식물·각종 수석도 전시되어 있는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휴양림의 상쾌한 분위기를 이을 수 있다.

▶ 찾아가는 길
구 거제대교에서 14㎞ 이정표 많아 찾기쉬워


거제는 바다를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가 좋고 곳곳에 갈 만한 곳이 많아 자가차량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낫다. 마산에서는 고성방면으로 국도2호선을, 진주에서는 고성방면으로 국도33호선을 타고 오면 된다. 고성에서 국도 14호선으로 갈아 타 거제로 향하면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을 듯.
신거제대교를 건너 둔덕면으로 향하는 길을 택해도 되고, 거제에 거의 다다라서 구거제대교쪽으로 빠져도 된다. 구거제대교를 건너면 바로 둔덕면이 나오기 때문에 구거제대교를 이용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대교를 건너면 폐왕성까지는 약 14km. 이정표가 군데군데 있어 찾아가기가 어렵지는 않지만 이정표가 작고 붙어있는 위치가 조금 애매한 곳도 있어 잘 살펴보며 찾아가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고현리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둔덕면으로 가는 버스가 제법 있고, 아니면 택시를 이용해도 그렇게 많은 요금은 나오지 않는다.
거제에는 폐왕성 뿐만 아니라 대략 30개 가까이 되는 성들이 군데군데 산재해 있다. 옛날 유배지로 명성이 높았던 만큼 지형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성지만 둘러봐도 하루로는 부족할 듯 싶다.
둔덕면 일대의 지명을 보면 당시의 시대상을 잘 알 수 있다. 농막리는 농사를 짓던 곳이고, 마장은 말을 먹이고 키웠던 곳, 옥동은 감옥이 있던 곳이다. 상둔과 하둔에는 군사가 주둔하던 진지가 있었고, 지금의 견내량인 망려는 바다의 변화를 지켜보던 전초기지였다. 술역은 역촌으로 지금의 정류장 역할을 했던 곳이며, 시목은 가축을 기르던 곳이었다.
거제는 해산물이 풍부하게 나는 곳이다. 하지만 인근 통영보다 가격이 조금 비싸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사 먹기에 부담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루 밤 묵을 만한 곳은 거제시 일대 어디에서든 쉽게 찾을 수 있어 불편함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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