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에 발족된 재경 마산학우회가 70년대 마산지역 학생운동의 맹아가 됐다는 점은 지난주에 이미 살펴본 바와 같지만, 처음부터 이 모임 자체가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것은 아니었다. 학우회 모임이 대개 그렇듯 재경 마산학우회 역시 순수한 애향심을 바탕으로 학생들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서울지역 유학생들의 애향심에 불을 당긴 것은 도청 유치문제였다.

이는 초대 회장인 조남규(현 한나라당 경남지부 사무처장)씨가 학우회지인 <남도 designtimesp=25751> 창간호(1975) 특별좌담에서 밝힌 말에서도 확인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학생활동을 위한 단체결성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러한 요구에 불을 붙인 것이 경남도청의 이전문제였습니다. 진주학우회가 벌인 경남도청 진주유치 서명운동은 마산학생들에게 매우 자극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단체결성 문제는 더욱 적극성을 띄게 되었습니다.”

조씨는 이어 학우회의 창립목적에 대해서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당시의 설립취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고향을 떠나온 서울에서 선후배 사이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함이며, 또 하나는 단합된 학생의 힘을 모아 고향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보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학우회의 초기 활동은 체육대회나 음악회, 미술전, 서화전 등 친목행사가 주류를 이뤘다. 이후 72년 수출자유지역 일본인 문제와 관련 형사가상재판과 한일관계에 관한 심포지엄 등을 개최하는 등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학우회 활동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같은 성향은 74년 한철수(현 고려철강 대표)씨가 10대 회장으로 당선되면서 좀 더 짙어졌다. 특히 74년은 설훈(현 민주당 국회의원)씨가 삼수 끝에 고려대에 입학하고, 박진해(현 마산MBC PD)·황성권(정치인)씨가 재수 후 각각 연세대와 외국어대에 입학한 해였고, 한해 전에 입학한 주대환(현 민주노동당 마산지구당위원장)·서익진(현 경남대 대우교수)·감정기(현 경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씨 등이 서울대 이념서클인 한국사회연구회를 통해 학생운동에 관여하고 있던 시기였다. 서울대 한국사회연구회에는 이미 이들의 4회 선배인 한석태(전 경남대 교수)씨도 활동중이었다.

특히 주대환씨는 그해 4월 민청학련의 유인물 등사작업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수배를 받아오다 8월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됐다 서울구치소를 거쳐 기소유예로 풀려나기도 했다.(당시 민청학련 사건의 핵심멤버 중 한사람이었던 이상익(현 민주당 창원 갑지구당 위원장)씨는 한양대 73학번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박진해씨가 학우회 편집장을 맡아 75년 회지 <남도 designtimesp=25765> 창간호를 펴냈고, 그해 1월에는 마산수출자유지역 여공원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 개설계획을 세우는 한편 작가 김정한씨 초청 학술강연회를 추진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정한씨 초청계획이 여의치 못해 마산교대(현 창원대) 정재관 교수를 초청, 마산가톨릭문화원에서 처음으로 학술강연회를 개최했다. 이어 2월에도 ‘한국근대화의 방향모색’이라는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계획했으나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해 무산됐다.

이들 마산고 출신 73·74학번들은 학우회를 진보적인 성격으로 개편한다는 데 의기투합, 재경 마산학우회 11대 회장에 서익진씨를 추대하고, 서울대 학우회장에 김진식·연세대에 박진해·건국대에 김장희씨를 각각 당선시켰다.

서익진 회장은 취임 후인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일제 식민지사관의 비판과 그 극복’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2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는 박진해·손신기·감정기·최낙경·허원 등이 연사로 나왔고, 서익진씨가 사회를 봤다. 이어 76년 1월에도 가톨릭문화원에서 연세대 한태동 박사를 초청, ‘민족문화 창조를 향한 새 가치관 모색’이라는 주제의 학술강연회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경남대 김계남 교수와 서익진·유병태·윤경 등이 토론자로 참석했고, 박진해씨가 사회를 봤다.

같은 학술강연회는 차기에도 이어져 77년에는 고려대 강만길 교수를 마산 가톨릭문화원으로 모셔왔으며, 같은 해 BBS 회원을 대상으로 야학을 실시하기도 있다.

78년 1월 21일에는 당시 해직교수였던 한완상씨(현 교육부 장관)를 초청, 박진해씨의 사회로 ‘청년과 청년문화’라는 주제의 강연회를 개최했다. 역시 장소는 마사나 가톨릭문화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공개적인 학우회 조직의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데 공감,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고 변혁을 모색하기 위한 소모임 활동의 필요성에 뜻을 모았다. 74년 겨울부터 박진해·김종철(고려대 75학번·작고) 등 자연스럽게 뜻이 통한 친구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온 소모임은 76년 20여명의 회원를 가진 모임으로 확대됐다. 박진해씨의 메모에 따르면 당시 소모임에 참여했던 멤버들은 다음과 같다.

△서울대 : 송정환·허원·차양호·이호철·신권철·신종신·오진환·옥영보·이명희·박정좌·김진식·김준 △연세대 : 박진해·배기룡·변효순 △고려대 : 한철수·김종철 △성균관대 : 우기동·이문봉

이들 외에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검거됐다 풀려난지 2개월만에 군에 징집된 주대환씨와 역시 군에 입대했던 황성권씨도 제대후인 77년부터 이 소모임에 합류했다.

이들은 매주 한차례씩 중국집과 다방, 그리고 방학때는 마산 가톨릭문화원 등에 모여 철학·역사·경제 등을 학습하면서 비판의식을 키워나갔다. 당시 이들이 교재로 삼았던 책들은 조용범의 후진국 경제론이나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파농의 종속이론 등이었고, 막 출간되기 시작한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designtimesp=25782>나 <해방전후사의 인식 designtimesp=25783> 등도 주요 텍스트로 활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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