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6일. 다들 봄꽃놀이에 여념이 없을 때 통영과 고성의 경계를 이루는 벽방산(碧芳山·650m)을 찾았다.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에 있는 벽방산은 불가에서는 스님의 밥그릇을 가리키는 ‘바리때 발(鉢)’자를 사용해 벽발산(碧鉢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벽방산에는 안정사를 비롯해 6개의 암자가 있는데, 이들을 왼쪽 천개산(525m)과 벽방산이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다.
안정사는 마지막에 들러보기로 하고 오른편 길을 따라 오르기로 했다. 이정표에 1㎞ 앞 가섭암(迦葉菴)을 가리키고 있다. 별로 가파르지 않고, 더군다나 차 1대는 거뜬하게 다닐 정도의 임도가 나있다.
10분정도 오르고 나니 오른편으로 가섭암이 보인다. 가섭암은 신라 29대 무열왕 원년인 서기 654년에 원효대사가 초창한 암자라고 하는데, 이 곳 벽방산에서 제일 먼저 창건된 암자라고 한다. 마침 나무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하더니 가까이서 보니 눈살이 찌푸려진다. 폐허가 되어버린 암자. 마침 지나가는 스님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니 오래된 건물인데다 지난해 장마로 인해 지붕부터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암자 옆에 가건물을 지어놓고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쓸쓸한 암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측은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이런 아픈 모습에서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와 절이 풍기는 신비로운 기운을 느껴본다는 것은 무리일 듯.
하지만 무너진 암자 정면에 자그마한 종 하나가 눈에 띈다. 벽방산 8경 가운데 5경인 가섭모종(迦葉暮鐘). 은은한 저녁 종소리(모종)를 듣기에 아직 일러 살며시 만져만 보았다.
가섭암에서 벗어나니 산길이 조금 가팔라지는 것 같다. 땀이 조금 나자마자 때마침 부는 산바람에 씻겨 개운한 느낌이 절로 든다. 바람을 타고 풍겨나오는 솔향이 머리 끝까지 시원하게 한다.
그렇게 가섭암에서 출발, 25분 정도 올라가니 정말 자그마한 의상암이 나무들 사이로 겨우 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기분을 유쾌하게 하는 게 의상암 입구부터 본격적인 산길이 열린다는 것. 널찍한 임도를 따라 걷다보니 조금 식상한 느낌이 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발 끝에 착착 감기는 촉촉한 흙길 맛이 비로소 산을 오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그런데 아뿔싸. 그 행복함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디지털카메라 배터리가 바닥이 나버린 것 아닌가. 고민할 것도 없이 배터리 구입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하산할 수 밖에 없었다. 정상이 바로 눈 앞이었지만 준비성이 부족한 내 자신을 탓하며….
좁은 암자 마당에 놓여 있는 평상에서 잠시 쉬고는 힘들어하는 다리를 격려하며 다시 산을 오른다. 의상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의상선대(義湘禪臺·좌선대)를 지나니 평지가 나오면서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으로는 벽방산 정상, 그리고 오른편으로는 암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시간을 많이 빼앗겼기에 암봉은 한 번 쳐다만 보고 벽방산 정상으로 향했다.
이전보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가끔씩 맞이하는 제법 가파른 암벽길도, 미끄러지는 흙길도 아파오는 다리에게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암벽과 나무와 흙과 맑은 공기가 어우러지는 조화가 더 자연스럽다. 그렇게 30여 분. 드디어 벽방산이 내 발 아래에 놓이는 순간이 왔다. 사방이 뻥뚫린 탓에 찬바람이 쌩쌩불며 내 몸을 날릴 듯한 기세로 덤비지만 그 또한 적수가 되지 못한다. 들어줄 이 없지만 그냥 고함을 질러본다.
정상에 오르고보니 산 아래에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정경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정공단을 등 뒤로 하고 서면 정가운데로 통영 시내와 통영항이 그럴싸하게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미륵도에 우뚝 솟아 있는 미륵산이 눈에 들어 오고, 그 뒤로 한산도가 기웃거리고 있다. 그리고 왼편으로는 커다란 거제도와 진해만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남해도도 어렴풋이 보인다. 또한 군데군데 떠 있는 욕지도며 사량도 등 작은 섬들이 아름다운 다도해를 이룬다. 산을 오르는 보람이 정상을 정복하는 쾌감이라면, 벽방산을 오르는 보람은 그 쾌감에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까지 곁들여진다. 마침 서서히 저물어가는 태양빛에 노출된 붉은 바다가 너무 아름답다.
감상은 이쯤에서 끝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을 2번 오르는 멍청한 짓만 없었더라면 여유롭게 즐겼을텐데 해가 쉬이 져버릴 것만 같은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벽방산을 너무 우습게 봤을까? 왔던 길이 아닌 은봉암 방향으로 내려가니 이 길이 만만찮다. 정상부터 제법 가파르더니 급기야 정말 가파른 암벽이 나왔다. 길이 없는 것이다. 어쩔줄 몰라 멍하니 바라보는데 한쪽에 로프가 묶여 저 아래에까지 늘어져 있다. 로프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는 조심조심 내려왔다. 등이며 이마에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반면 진짜 산을 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암벽길을 벗어나니 그렇게 하산하기에 어렵지는 않다. 20여 분을 내려오니 또다시 평지가 나오며 임도가 시원하게 나있다. 짙게 우거진 숲을 오른편으로 하고 10여 분 더 내려와 은봉암에 닿았다. 백팔계단(百八階段)이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온다. 특히 먼저 2개의 암자보다는 상당히 깨끗하고 정갈하다.
산의 정취와 절의 아늑함을 더 즐기고 싶은데 이미 져버린 해를 탓할 수가 없다. 안정사를 제법 벗어나서 뒤돌아보는 벽방산과 천개산, 그리고 곳곳의 작은 암자들이 그렇게 편안하게 보일 수가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마음 속 깊이 편안함이 밀려오며 어느덧 나도 산사람이 되어 있었다.

▶ 찾아가는 길

통영 벽방산은 교통편이 불편하지 않다. 자가차량을 이용하면 더더욱 편리하겠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별로 무리가 없다.
자가차량을 이용할 경우 진주방면에서는 사천읍에서 33번 국토를 타고 고성읍까지, 마산방면에서는 2번국도와 14번 국도를 따라 고성읍까지 와서 율대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009번 지방도로를 따라 안정사까지 가면 된다.
통영방면에서는 14번도로를 타고 고성방향으로 가다가 노산리에서 광도면쪽으로 들어와서 지방도 1021호를 따라 안정리 벽방초등학교 앞까지 가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해안도로를 따라가기 보다는 내륙쪽 길이 더 편리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무방하다. 이 경우 통영에서 보다는 고성에서 이용하는 게 더 낫겠다. 벽방산이 행정구역상으로는 통영이지만 고성에서 더 가깝기 때문이다.
고성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안정리까지 가는 버스는 오전 7시 35분·9시 35분·10시45분·12시 45분·오후 2시 45분·3시 45분·5시45분·6시 45분·7시 45분·9시 30분 총 10대가 1~2시간 간격으로 운행중이다. 때문에 버스시간을 잘 메모해두고 운행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게는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30분 정도 걸리며, 벽방초등학교 앞에서 내리면 된다. 통영에서는 시내버스 64번과 65번이 수시로 다니지만 1시간 가량 걸리기 때문에 다소 불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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