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거리 하나를 떠올리라고 하면 수학여행이 으뜸이다. 특히 여가문화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던 80~90년대 수학여행은 중·고등학생들에게 유일한 사회체험이었고 놀이를 즐길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수학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이었다. 유명한 유적지나 문화재를 찾아 수백명의 학생들이 관광버스에 나눠타고 반별로 몰려다니며 구경하고 밤이면 캠프파이어를 하거나 숙박지 이곳저곳을 서성거리며 보낸 것이 사실상 수학여행에 관한 기억의 전부다.

하지만 수학여행 풍속도가 변화를 맞고 있다. 경상남도 교육청이 수학여행에 관련된 거의 모든 권한을 학교장에게 위임함으로써 학교마다 개성있는 수학여행을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 어떻게 바뀌나

경남도 교육청은 지난 3일 수학여행 운영에 학생·학부모·교사의 의견을 수렴하고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학교장이 결정하도록 하는 수학여행운영지침을 일선학교에 시달했다.

‘2001학년도 수학여행 운영’지침은 경남교육위원회 규제위원회의 내부 규제사무 정비결정에 따른 것으로, 지난해까지 일선학교에서 도교육청에 수학여행 승인신청과 결과를 보고하던 절차를 없애고 수학여행 목적지 선정·수학여행기간·차량임차료 등 수학여행운영 결정권을 학교에 위임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도교육청은 수학여행 운영이 학교에 전적으로 맡겨짐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놀이코스 이용금지·사전답사·사전교육·사후평가·테마별 수학여행 등 교육적인 수학여행이 될 수 있도록 권장사항으로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학교마다 비슷비슷하게 진행됐던 수학여행이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교사와 학교장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의 수학여행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수학여행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 테마별 수학여행 사례

이미 전국적으로 수학여행 문화가 바뀌고 있는 추세다. 서울의 경우 몇 년 전부터 테마별 수학여행을 시행하는 학교가 늘어나고 있고 일부 정착단계에 들어선 학교까지 있다.

이들 학교는 농촌체험·바다 개펄탐사·도자기 제작·동굴탐험 등으로 주제를 나누고 학생들의 희망에 따라 소그룹으로 40~50명씩 나눠 따로따로 수학여행을 간다. 수학여행을 가기 3~4개월전에 조편성을 마치고 조별로 여행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토론을 거친다.

문학체험을 떠나는 조는 사전에 인터넷이나 관련서적을 통해 해당 작품과 인물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이들과 관련된 자료집을 만들기도 한다. 수학여행을 가서는 테마와 관련있는 전문가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직접 토론의 과정을 거친다.

개펄탐사나 동굴탐험과 같은 현장 학습은 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는 자연에 관한 소중함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과정을 담는다. 환경파괴의 현장을 찾아가 직접 오염실태를 조사하기도 하고 환경전문가를 초청해 직접 그 심각성을 강의로 듣는다.

농촌체험을 떠나는 그룹도 마찬가지다. 여행이 아니라 농촌의 들녘에서 직접 밭 일구고 농작물을 가꾸면서 땀을 흘려가며 농촌생활을 체험해 본다. 수학여행이라기보다는 현장체험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에 가깝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조별로 조사·연구자료를 토대로 다시 토론을 벌이고 그 결과물은 책자로 발간해 기록으로 남긴다. 지금까지 수학여행의 개념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경남지역에도 지난 98년부터 테마별 수학여행이 시행됐다. 하지만 이들 테마여행은 행선지를 다양하게 나눠 소그룹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 외에 기존 수학여행과 다를 바 없다. 지역에서는 가포고등학교 문학동아리인 큰들이 방학을 이용해 테마별 여행을 떠나고 있다. 동아리활동의 부분이긴 하지만 수학여행의 테마로도 손색이 없는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관련기사 2월19일자 올곧은 교육)

▶ 문제점은 없나

수학여행 운영과 관련된 모든 권한이 학교로 위임됨으로써 학생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현장학습 기회제공, 소그룹단위의 학습효과 상승 등 긍정적인 측면외에 안전문제나 경제적인 문제, 혹은 수학여행 기획부실에 따른 운영부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일선학교에서는 당장 수학여행 코스를 결정하고 사전답사는 물론 차량과 숙박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 지금까지 관광여행사에서 제공하는 관광코스 중의 한가지를 선택하면 차량이나 숙박시설이 해결됐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미 지난 98년부터 테마여행을 실시해 오고 있는 대부분 경남지역 학교들도 자체적으로 구성된 기획팀이 며칠간 사전답사를 떠나야 하는 등 업무적인 부담을 안고 있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소그룹단위의 테마여행을 떠나게 되면 경제적인 부담증가와 함께 숙식 등 서비스의 부실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수백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했던 차량회사나 숙박업체가 인원수가 줄어든 수학여행단에 할인율 적용이나 서비스에서 기존과 같은 혜택을 제공할지 의문이다. 결국 경제적 부담은 물론이고 질 낮은 서비스가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안전문제도 중요하다. 소그룹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될 경우 그룹에 필수적으로 동행해야 하는 양호교사의 수급문제가 당장 걸림돌이다. 일선학교는 소그룹마다 양호교사를 동행할 만한 여력이 없는 현실이다.

전교조 경남지부 관계자는 “수학여행 자율화가 안고 있는 장·단점은 분명히 있지만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이고 교사와 교장의 의지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바람직한 움직임으로 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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