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6회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시대가 열리면서 4·19직후 마산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벌어졌던 각종 사회운동은 완전히 단절됐다. 통일운동·교육민주화운동·혁신정당운동·양민학살 진상규명운동 등을 주도해온 운동가들은 모두 구속됐고, 지역사회는 표면적으로 지극히 평온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런 가운데 쿠데타정권의 직접적인 탄압을 모면한 일부 사회단체 간부와 자유당 잔존세력, 민주당·신민당계 정당인들은 63년 정치활동 재개조치와 함께 대부분 박정희의 공화당에 줄을 서게 된다.

이에 따라 60년대는 이렇다할 사회운동이 모두 사라진 채 강요된 침묵만이 존재하는 상태가 지속된다. 물론 그 사이 부산에 있던 도청을 자기 지역에 유치하기 위한 운동이 마산과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으나 기존 사회운동의 흐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잿더미 속에서도 새 생명이 생겨나듯 단절된 역사 속에서도 새로운 운동세대가 성장해가고 있었다. 79년 10·18 부마민주항쟁은 이미 60년대의 잿더미를 거름삼아 새싹을 틔울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새싹은 마산출신 서울 유학생들의 모임인 재경 마산학우회가 맹아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70년대 학생운동그룹을 형성한 한석태·설훈·황성권·주대환·서익진·박재완·박진해·김진식·감정기·한철수·김종철 등이 재경 마산학우회를 통해 방학을 이용한 지역활동을 시작했고, 이들이 경남대 정성기·전재영·이윤도 및 동아대 신용수 등과 연결되면서 지역 학생운동의 태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각종 소모임과 학술강연, 연극·탈춤운동, 양서조합운동으로 맥을 이어가면서 경남대 최초의 이념동아리였던 ‘사회과학연구회’를 낳았고, 이같은 운동의 자양분이 10·18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경 마산학우회가 처음부터 이같은 운동성을 갖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학우회에서 발간한 회지 <남도(南都) designtimesp=26643> 창간호(75년 2월)에 실린 연혁을 보면 재경 학우회는 65년 11월 조남규씨를 초대회장으로 창립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학우회는 창립직후인 66년 1월 7일 마산시청 회의실에서 시정좌담회를 갖고 ‘경남도청 마산이전 촉진위원회 마산지역 개발위원회’ 결성에 참여한 것으로 나와 있다.

또 이틀 후인 9일에는 3·15회관에서 음악회를 개최하고 4월 10일 신입생 환영회를 여는 등 주로 순수한 애향심에 기초한 친목모임으로 고향 발전에 기여하려는 활동을 해왔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록을 남긴다는 차원에서 재경 마산학우회의 창립이후 75년까지 주요 연혁을 <남도 designtimesp=26648> 창간호에서 발췌, 소개한다. 창간호는 당시 연세대 국문과 학생으로 편집장을 맡았던 마산MBC PD 박진해 차장이 보관해온 것이다.

△65년 11월 30일=창립총회, 학우회장 조남규, 부회장 김기철·유윤희

△66년 1월 7일=시정좌담회(마산시청 회의실)

△66년 11월 6일=제2회 정기총회, 회장 최규현, 부회장 권경중·구덕순

△67년 2월 5일~12일=제1회 학우제(한성회관), 초청강연회, 음악회, 미술전, 시화전, 연극, 체육대회

△67년 5월 27일=제3회 정기총회 및 신입생환영회(교육회관), 회장 박종우, 부회장 이학우·김미숙

△67년 8월 1일~10일=제2회 학우제(3·15회관), 음악회, 연극, 지상문학발표회, 방송좌담, 마산시개발계획 청취

△68년 4월 5일=제4회 정기총회 및 신입생환영회, 회장 이학부

△68년 8월 1일~10일=제3회 학우제, 교도소 교양서적보내기, 음악감상회, 시민위안소

△69년 4월 5일=제5회 정기총회 및 신입생환영회, 회장 조호제, 부회장 김성철·김영이

△69년 8월 10일~15일=제4회 학우제

△70년 7월 20일~31일=제5회 학우제

△71년 2월 3일~6일=겨울밤의 잔치, 문학의 밤(한성예식장) 회원 및 학생·시민 250여명 참석, 심포지엄 ‘우리가 보는 한국사회’ 200여명 참석

△71년 3월 27일=제7회 정기총회 및 신입생 환영회(신촌 로타리예식장), 회장 차철환

△72년 6월 4일=신입생 환영 체육대회, 8대회장 윤창득, 부회장 하남근·구미화

△73년 8월 19일=제9회 정기총회(마고 강당), 회장 오창환, 부회장 이수기·김치옥

△74년 4월 5일=제10대 정기총회 및 신입생 환영회(신촌 로타리예식장), 회장 한철수(고려대), 부회장 전영이(이화여대)·황동규(고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구성된 10대 집행부는 이전의 학우회 활동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우선 박진해(연세대 국문)·조이수(서울대 인문계)·유인자(숙명여대 국문)·송정환(서울대 사회계)·김명숙(숙명여대 영문) 등 5명으로 편집위원회를 구성, 학우회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때 발간된 <남도 designtimesp=26685>는 편집후기를 통해 “본지는 이 고장 젊은 지성의 대변지가 될 것임을 자부한다”고 선언했다.

<남도 designtimesp=26688>는 이 선언에 걸맞게 당시로선 상당히 사회성이 짙은 특집 ‘후진국 민족주의’를 편성,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서익진씨의 ‘경제적 측면에서 본 후진국 민족주의’ 등 2편의 논문을 게재하고, 3·15정신의 부활을 주장하는 박진해씨의 칼럼과 수출자유지역의 열악한 근로조건 등 문제점을 지적한 송정환씨의 글을 싣는 등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학우회는 또한 75년 2월 4일 마산시청 회의실에서 최재영 마산시장 및 기획실장과 만나 수출자유지역의 문제와 창원공단 이주민 문제, 사적과 자연환경 보호문제, 일본문화 침식에 따른 문제, 인구증가와 물질문화의 증대에 비례할 정신문화 증진 방안 등을 논의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함께 1월 20일에는 가톨릭회관에서 제1회 동계 학술강연회를 개최한 데 이어 2월 5일에는 ‘한국근대화의 방향모색’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해 무산되는 등 사회참여 프로그램을 꾸준히 추진했다.

이같은 학우회의 분위기는 몇몇 학생들의 학습 소모임활동으로 이어지면서 70년대 학생운동권의 형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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