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하게 나를 감싸는 노을빛 추억

산마루에서 사방을 바라보는 눈맛이 좋다는 데가 바로 고성 향로봉(578m)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산은 아니다. 바로 옆 사천 삼천포의 와룡산(799m)의 명성에 가려진 채 숨어 있다고나 할까. 이름만 보면 와룡산의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하나쯤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줄기만 함께 할 뿐 전혀 다른 산이라고 해야 옳겠다.
산행의 기점은 운흥사다. 운흥사 들머리에서 왼쪽으로 비껴나가는 콘크리트 길이 이어지는데, 5분쯤 걸려 천진암에 다다르면 좁다랗고 다닥다닥 층계를 이룬 흙길로 바뀐다.
여기서부터 길은 가팔라지는데 산은 진작부터 제 맛을 내고 있다. 잘 다듬은 골짜기에는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이 있다. 살짝 언 얼음들이 녹을 듯 말 듯하고 흙길도 바싹 얼었던지 서릿발이 푸석푸석하다.
골짝과 능선을 뒤덮은 나무들은 모두 헐벗었다. 크거나 작거나간에 잎을 떨구고 가을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이쪽저쪽에 빽빽하다. 소나무는 차라리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가을철이면 단풍이 보통 대단하지 않겠다.
운흥사 들머리 느티나무·벚나무에서부터 길 따라 이어지는 누릇누릇 단풍들은 당연히 올 가을 몫이다. 하지만 벗은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고, 아래서는 바다가 빛을 뿜는 장면은 지금 이 겨울이 아니면 보기 어렵다. 마구 헤집음을 자랑이나 하듯이, 햇살은 부옇게 흩어지며 숲 전체를 둥둥 뜨는 듯한 분위기로 몰아간다.
산길 모퉁이에서 한숨 돌리다보면 집채만한 바위덩이가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온다. 깔아뭉갤 만큼 엄청난 크기는 물론 아니다. 대신 사람 두세 배 크기로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저만큼 서 있는 것이다.
바다로 밀고 나가는 뱃머리 같은 놈도 있고 돼지나 곰이 떠오르는 모습도 있다. 삐죽 내솟은 바위는 한결같이 내려다보는 좋은 전망을 보증하는데, 받침돌을 괴고 일부러 쌓아올린 돌탑도 여럿이다. 잠깐 산길을 오가면서도 사람들은 기원할 게 많고도 많은가 보다.

피곤한 몸 뉘는 저녁 무렵 해는 보금자리로 찾아든다

꿈 하나가득 가슴에 품고 밝은 내일 그리며 잠든다


운흥사~천진암~낙서암까지는 20분, 낙서암에서 산능선까지는 다시 30분이 걸린다. 능선에서 왼쪽 산마루가 있는 쪽으로 가면 상두바위, 오른쪽으로 가면 까마귀바위가 있는데 모두 10분 안쪽이면 가 닿는다.
상두바위는 남쪽과 동쪽이 확 트여 있다.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자란말(만?) 일대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고 동쪽과 북쪽으로는 들판과 인가가 조그맣게 엎드리고 있다.
까마귀바위는 저녁 해질 무렵 남쪽과 서쪽을 바라보는 풍경이 좋다. 까마귀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가운데 가파른 능선 끝자락에 올라서면 바다가 환히 열린다.
삼천포항 앞바다인가 보다. 왼쪽 귀퉁이에 화력발전소 비슷한 게 보이고 나머지는 햇빛을 받아서 누렇다. 태양은 하늘보다 바다에 있는 놈이 더 밝아 보이는데 되쏘는 빛 또한 더없이 강렬하다. 점점이 떠 있는 섬은 흐릿하게 지워진다.
땀은 호흡 가다듬는 새에 식어버렸다. 찬바람 한 줄기 스치더니 등짝이 서늘하다. 목을 움츠리며 힐끗 돌아보니 삼천포 각산인 듯한 녀석이 바위를 줄레줄레 잇달고서 나도 좀 봐줘, 다가선다. 벌거벗은 나무들 우거진 사이로 깎아지른 바위가 얼굴 내밀고 산 너머 바다는 아련히 수평선을 지우며 꿈꾸는 분위기로 빠져든다.

▶ 찾아가는 길

마산·창원에서는 국도 14호선을 따라 월영동 경남대앞 댓거리를 벗어나 계속 달리면 된다. 진주쪽에서는 국도 3호선을 따라 사천까지 간 다음 고성으로 뻗은 국도 33호선을 타면 된다.
진주·사천에서 오는 길과 마산·창원에서 오는 길은 고성군 상리면 소재지 상리초등학교 앞에서 마주친다. 어느 쪽에서 오든지 관계없이 옆으로 ‘삼천포항’ 표지판이 있는 쪽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지방도 1016번 길이다.
여기서 다시 12km 정도 가면 봉현 마을이 나온다. 향로봉에 가려면 봉현 마을을 바라보면서 ‘운흥사’ 표지판을 따라 왼쪽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다음에 다시 2km 못 미처 나오는 와룡마을에서 다시 왼편으로 가면 산행의 기점 운흥사가 나온다.
와룡 마을 앞에는 하이저수지가 엎어져 있다. 들판 끝자락까지 살짝 적시고 있는데 청둥오리가 수백 마리 겨울을 나고 있다. 그리 작지 않은 크기인데 위에 인 산봉우리는 꼭 낙타등같이 생겼다. 시간이 남으면 여기 못가에서 스산스러움을 벗삼아 잠시 거닐어도 좋겠다.
등산길 가장 위쪽에 있는 낙서암의 풍경 가운데 하나는 물고기 모양 쇳조각 대신 청석을 달아놓았다. 원래 매달았던 쇳조각이 사라져서 대신 달아놓은 듯한데 소리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모양은 그럴듯해 보였다. 일부러라도 한 번 들러서 확인해 보면 재미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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