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을 주제로 한 TV토론회에서 어느 출연자는 개발독재의 당위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요약하면 생존권을 담보로 한 독재는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인데 그걸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독재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라는 것. 참으로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독재권력은 개인의 권리를 무참하게 짓 밟는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절대적 권력으로 군림한 군사정권은 인권의 암흑기였다. 세월이 흘러 민주화 과정에 있는 지금 당시의 개발 독재가 없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경제적 발전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독재가 즉 부의 축적이었다는 평가와 같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한다. 5·16군사쿠데타 없이 민주화가 진행돼 왔더라면 한국의 경제는 어떤 수준에 도달해 있었을까.

IMF는 문민화 초입에 일어난 불행한 사태였다. 호왈 문민독재로 일컬어지던 YS정권 말기의 불운이었다. 후에 학자들은 거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달리하겠지만 그 사태가 문민정부 단독의 병폐 때문이었다고 단정지을 것 같지는 않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 온 구조적인 독재부패의 고름주머니가 터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 후유증은 미증유의 블랙홀로 현재 우리에게 닥쳐와 있다. 정치·사회·경제 각 분야에서 뼈를 깎는 구조조정, 말하자면 사회적 재편과 개혁을 피하지 못하게 한다. 당연히 저항과 고통이 수반된다.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는 작금의 사회상은 다만 ‘현재의 문제’로 분류될 수 없다. 출처는 아무래도 개발독재라는 저쪽의 장막에 가려져 있지 않을까.

원인과 결과는 종종 예상치 못한 등식을 낳는다. ‘잘 살아보세’라는 말 속에는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뜻도 포함돼 있다. 단지 빵만으로 그 말을 함축시킨다면 돼지 이상의 생명가치를 발견치 못한다. 군사정권은 빵을 내세워 개인의 자유를 저당잡았다. 그런 후에 절대권력을 획책했다. 개발은 목표가 아니라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변질됐다. 인권운동가들이 그런 정권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민주정부는 경제개발의 원동력이 못될 것이다라는 논지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개발독재의 논리역설인 것이다. 개인의 권리주장이 강력하고 단체 이기주의가 있다고 해서 빈곤해야 된다는 법은 없다. 대개의 선진 민주국가가 인권을 철저히 보장하고 제도 발전을 다져왔기 때문에 강국 반열에 올랐음을 본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역사적 사실 자체로서의 비민주 정권, 그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공과는 더 먼 후대의 몫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필요악이었든, 시대적 사생아였든 해방 이후 40여년간의 철권통치가 한국의 민주화와 인간적 권리를 후퇴시킨 엄연한 현실이었음을 성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평가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이 시대를 함께 걸어온 사람들로서는 체험적 주체를 과시하기 싫은 기억들이 많다.

한 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연말경기 체감지수가 지난 72년 이후 최악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만큼 지금은 호주머니 상황이 좋지 않다.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소비심리가 위축되면 흥청망청하던 옛날이 그리워진다. 알고보면 그게 거품경제였던 것조차 잊는다. 그리고는 절망감에 쉬 빠진다.

개발독재의 향수는 그런 때에 불쑥불쑥 고개를 든다. 구조적 모순이 그때는 권력의 그늘에 숨어 있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그걸 잠재우는 것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때와는 달리 민주화와 인권을 동반해야 되는 과제가 걸려있다. 과연 우위를 입증해 보일 수 있을지는 김대중 정부의 향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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