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근한 발걸음~젖어드는 사색

자연스럽고 푸근하게 다가오는 풍경이 그립다. 누가 찾아오기를 기대하고 일부러 깨끗하게 꾸민 경치는 바라지 않는다. 자다가 금방 일어나 세수한 듯한 모습, 사람들 신경 안 쓰고 대청 마루에 걸터앉은 방심한 모양을 보고 싶은 것이다.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일상은 아니지만 낯익게 본 듯한 풍경, 일상인 듯 하면서도 속내를 쉬 내비치지 않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었다. 선인의 숨결과 손길이 어린 고인돌과 옛집들도, 유별난 보살핌을 받지 않고 사람들 틈새에 끼어 있었다.
학림 마을에서 하일중학교를 끼고 금단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겨울비가 추적대는 바람에 나다니는 이는 없다. 시멘트와 흙돌 담장이 어우러지면서 때로는 허물어진 데도 나온다. 마을회관이 있는 끝머리 왼쪽에 느티나무 아래엔 유자나무가 아직 열매를 매단 채 서 있다.
고인돌이다. 느티나무 아래 키보다 높은 돌이 있고 앞쪽 밭에도 자잘한 돌을 깐 위에 바둑판처럼 널찍한 녀석이 둘 퍼질러 있다. 하지만 여기는 좀 삐딱하게 놓여 있는 반면, 위편 노적가리를 뒤로 쌓은 데 있는 고인돌은 참 잘 생겼다. 모도 없이 둥글둥글한데다 구석구석 딱 맞게 받친 듯 조금도 기울지 않았다.
유럽 어디에선가 10만년도 더 넘은 주검 위에 뿌려진 꽃잎을 보고 장례 의식이 이미 그때부터 치러졌음을 짐작했다지 아마. 선사시대를 살았던 이 땅 선조들도 나름대로 슬픔을 누르며 고인돌을 옮겼을 것이다. 표지석이나 제단으로 쓰려고 고인돌을 만들면서도 살아남은 이를 위해 풍요와 다산을 빌었을 것이다.
창고 뒤쪽으로 들판이 펼쳐진다. 이삭을 달았을 벼포기는 파릇파릇 돋아나는 보리싹에게 주인 자리를 내주었다. 물론 벼포기만 남아 황폐하고 쓸쓸해진 농업 현실을 짐작하게 해 주는 뙈기들도 숱하게 있다.
철탑을 향해 오르는 산비탈은 가지 앙상한 감나무밭이다. 채 못 따고 그대로 남은 감이 꽤 많다. 인건비조차 못 건지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겨보는데, 바닥에 갖다 놓은 비료 포대들엔 그래도 새 봄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농부의 심경이 담겨 있다.

너무나 꾸밈 없는 풍경 세상을 잊고 나를 잊네

곳곳에 널린 오랜 유적 또다른 날 만나고 가네


아래로는 임포 포구가 눈에 담긴다.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자란만 앞바다에 사량도가 있고, 비 내리는 겨울바다 위에 포구를 막 떠난 배가 한 척 떠 있다. 중학교 울타리를 돌아, 오른쪽으로 무슨 마트와 구멍가게를 지나 포구 안에 들어서니 비린내가 훅 뿜어 나온다.
손가락 만한 복어 몇 마리가 죽어자빠져 있고, 평소 갓 잡은 고기로 가득했을 시멘트 물탱크는 텅 비어 있다. 이곳 횟집은 꽤 알려진 때문인지 전용 버스도 45인승인데, 오늘은 빈 채로 을씨년스레 비를 맞는다.
돌아나오는 아스팔트길의 오른쪽 끝에는 학동이 매달렸다. 문화재로 지정된 최씨고가를 비롯해 옛집들이 여럿 있으나, 그냥 사람 사는 냄새가 폴폴 나는 게 오히려 색다르다.
들머리에 닿기도 전에 ‘피댓줄’ 돌리는 발동소리가 요란한 것이다. 거의 없어진 동네방앗간 발동 소리를 예서 들을 줄은 몰랐다. 파란 함석 지붕에다 흙담장을 친 방앗간 앞에 번호판이 울산인 승용차가 한 대 있다. 햅쌀이라도 찧고 있는 모양이다.
‘피대 발동’ 소리 때문에 마을은 오히려 조용하다. 이따금 인기척을 알아채고 개가 짖을 뿐이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는 10분이면 족하다. 그러나 높고 낮은 흙담장을 따라 돌면서, 때로는 우람하게 생긴 ‘반쯤’ 솟을대문을 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그윽하기만 하다.


▶ 찾아가는 길

창원·마산에서는 국도 14호선을 따라 나가 진동을 지난 다음 국도 2호선을 오른쪽으로 떼보내고 달리면 고성읍이 나온다. 읍내서는 삼산면 표지판을 따라 군청을 끼고 돌면 곧바로 해안도로가 나타나며, 20km 남짓 달리면 하일면 소재지인 학림리가 나온다.
길은 곧아서 도중에 놓칠 걱정은 안해도 된다. 정 미덥지 못하면 상족암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용호·중촌 삼거리와 도중에 마주치지만 그대로 달리기만 하면 된다.
진주서는 국도 33호선을 타고 오다 부포 마을에서 오른쪽 장치리쪽으로 틀면 된다. 장치리 중촌삼거리에서 다시 오른쪽 삼천포·상족암쪽으로 꺾어 조금 더 가면 바로 나온다.
대중교통은 좋지 않다. 마산에서 고성은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10분마다, 진주에서 고성은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 55분까지 15분마다 있지만 읍내 기점서 학림 가는 버스는 아침 8시 5분 낮 12시 20분과 4시 55분 석 대밖에 없고 하이면 종점서 나오는 버스도 각각 한 시간쯤 늦게 있을 뿐이다.
발길 머문 뒤에는 삼천포쪽으로 10km쯤 달려서 공룡발자국으로 이름난 상족암에 가도 되고, 하일중학교 앞을 지나는 길로 가다가 왼쪽 청룡사 표지판을 보고 좌이산(392m)에 올라 자란만을 눈에 담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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