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조그만 섬 굽어보이니 산정에 서있는 내가 바로 부처로다

통영에 살았으면서도, 그 품에 둥지를 틀고 2년을 지내고도 한번도 찾지 않았던 통영 미륵산(461m)을 새삼스럽게 찾아갔다. 새삼스럽다는 것은 지난 주말께 통영의 환경단체와 불교계가 미륵산 케이블카 설치를 막기 위해 천막농성을 열흘 넘게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27일 아침. 창원서 서둔다고 했는데도 통영시 봉평동 용화사 광장에 도착하니 오전 9시를 조금 넘겼다. 운동삼아 산에 오르는 사람과 지극한 불심으로 절을 찾는 사람들 몇몇이 보일 뿐 ‘미륵산을 그대로 두라’는 플래카드인지 걸개그림인지가 걸린 천막농성장이 스산하게 부는 바람만큼이나 을씨년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천막을 열고 들어서니 통영환경운동연합 설종국 지도위원이 초등학교 1학년인 그의 아들과 함게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다. 따끈한 녹차 한잔에 몸을 녹이며 설씨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슴은 안타까움과 분노사이를 오가며 들끓었다.
행정기관이 환경훼손을 강행하려 하는데도 온몸으로 막는 길 말고는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시장에 되기 전에는 케이블카 설치 반대 입장에 서 있다가 당선되고나니 언제그랬냐는 듯 강행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튼 사람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타까움이었다.
농성장을 뒤로 하고 광장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토파 도솔암으로 올랐다. 산문 초입에 불도량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은 두개의 돌기둥이 서 있고, 그 사이를 들어서니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대웅전이 정적속에 앉아 있다.
도솔암은 고려태조 21년 도솔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초음과 자암 같은 이름높은 스님들이 수도하면서 한때 ‘남방제일 선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남문화재 자료 62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는 대밭에 이는 바람소리가 시원하다.
도솔암에서 통영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왜 ‘동양의 나포리’라 불리는지 실감할 수 있다. 남망산 공원과 서호동 연안여객터미널 사이에 움푹이 들어단 강구안을 따라 형성된 시가지는 환상적이다.
이제야 초입에 서 있는 돌기둥의 용도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들어오거나 떠나는 배나 밤낮으로 내려보이는 아름다운 세속의 풍경은 비록 수도의 길을 걷는 수도승에게도 참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려나. 그 유혹을 조금이나마 가려보려는 마음이었으려나.
돌아나오자니 돌기둥 뒷면에 세로로 새겨있는 글이 무게를 더한다. 오른쪽부터 읽자니 ‘서로 돕는 곳 행복의 나라/작은 돌 큰 돌 함께 모이어/온전한 돌담 이루어지듯/서로 의지한 부처님 나라’. 왼쪽부터 읽어도 새로운 맛이 더한다.

밤낮으로 아름다운 풍경 통영이 곧‘동양의 나폴리’

도솔암이 자리한 곳은 이른바 ‘금계 포란형’. 알을 품은 닭을 행여 뱀이 노릴까 해서 돌기둥 뒤에는 작은 돌 돼지상을 세워뒀다.
도솔암을 벗어나 정상을 향하자니 난을 캐는 사람인 듯 두 남정이 지천으로 널린 춘란밭을 손짓하기도 하고 자세히 뚫어 보기도 하면서 이야기가 재미있다.
난을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로는 진짜 난꾼은 귀한 난만 캐지 아무렇게나 손대지 않는다는데, 난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무지막지하게 산을 파헤치는 사람들은 또 왜그렇게 많은지. 그나마 이곳은 ‘막된’ 난꾼들의 손을 타지 않은 듯 해 다행이다.
그들을 앞질러 오르는데 저만치 앞서 운동복 차림의 한 아낙이 가뿐하게 산을 오르고 있다. 그 아낙을 앞지르니 왼쪽에 3~4평은 됨직한 너른 바위가 나오고 전망이 확 틘다. 남서쪽으로는 산양읍의 들판이 목가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그 조금 왼쪽으로 삼덕항이 보인다.
반대편으로는 도솔암에서 보았던 통영시가 전경을 너머 거제대교와 자란만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시원함을 조금이라도 더 사진에 담기위해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 동안 그 아낙은 다시 나를 앞질렀다.
그렇게 서너곳에 전망좋은 바위가 나올때마다 아낙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정상 바로 앞에까지 다다랐다.
근데 이게 웬건가. 가파른 바위틈으로 사람들이 오르다 행여 미끄러져 다칠까 염려해서이겠지만 한 스무계단쯤 되는 녹안스는 강철 계단이 놓여 있다. 그러나 그 아낙은 계단은 본체만체, 바위틈으로 기다시피 올라간다.
이쯤에서 우리 신문사 김훤주 기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사람을 게으르게(편하게) 하는 것은 대개 반 환경적이다.”
근교산이 마을 체육공원처럼 됐다고 해서 계단을 만들고 길을 닦는다면 더 많은 환경훼손을 감수해야 한다. 아낙을 따라 바위틈으로 올라섰지만 곳곳에 손발을 걸칠만한 곳이 있어 보기보다 위험하지는 않았다.
사람의 안전과 편리를 위한다는, 환경이 어떻게 훼손될지에 대한 우려는 뒤에 숨긴 ‘선의’에서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는 발상도 생겨나지 않았을까. 거기에 이윤추구라는 자본의 욕심이 더해지면서 강한 추진력을 얻고, 웬만한 반대에는 꿈쩍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물줄기가 된 것은 아닐까.
정상에서 용화사로 곧바로 가는 길은 가파르지만 40여분이면 다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미래사쪽 길을 잡았다. 우리나라 현대불교의 큰 줄기인 효봉문중이 싹튼 곳을 다시 둘러보고싶었기 때문이다.
효봉선사는 기인이라 불릴만 하다. 신동소리를 듣던 그는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법관이 됐다. 장래가 보장된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1923년 어느날 한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는 하루아침에 판사직과 가족을 버리고 엿장수가 돼 전국을 유랑했다. 유랑생활 3년만에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던 석두화상 문하에 들어가 머리를 깍고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서른 여덟이라는 늦깍이 수도승이었지만 자못 진지하고 절박했던 듯 하다. 한번 가부좌를 틀면 엉덩이 살이 물러 헤져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고도 한다. 마흔넷이 되던 해에는 토굴 속에서 밥 들어오는 구멍과 변 보는 구멍만 뚤허둔 뒤 토굴을 밀폐하고 1년반을 참선하다가 대오각성하고 토굴 벽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고치속 번데기가 우화하듯 자유를 얻은 그는 ‘오도송’을 불렀다.
“바다 및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타는 불 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를 달이네/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 것인가/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그런 효봉이 한국전쟁 기간동안 제자 구산의 지극한 봉양을 받으며 도솔암에 머물렀다. 이후 구산은 반대쪽에 미래사를 창건했으니 효봉을 찾는 납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여기서 회광선사, 법정, 일초(고은 시인이 환속하기 전의 법명) 등이 머리를 깎거나 수도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용화사와 미래사는 모두 송광사 말사로 효봉 문중이 이어왔지만 이제는 법통은 효봉문중에서 이어가면서도 조계종 행정 계선상으로는 쌍계사 말사로 재편돼 있다.

미래사~용화사 1.5km 가벼운 산책로 일품 곳곳에 미륵의 숨결 묻어나

미래사에는 도솔영각에 석두화상을 비롯해 효봉, 구산의 영정과 중창주인 종욱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다. 또 용화사에는 효봉의 사리탑과 등신상이 있다. 효봉 이전부터 통영은 미륵신앙이 깊숙이 뿌리박은 ‘불국정토’로 인식된 듯 하다.
미륵신앙이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시대가 끝나면 도솔천에서 4000세, 인간의 시간개념으로는 56억7000만년을 영위한 미륵불이 강림해 용화수 아래에서 삼회의 설법을 베풀어 중생을 구원한다는 것 아닌가. 미륵산은 그 미륵불이 강림할 약속의 땅이다. 용화산이라 불리는 것도, 용화사라는 절이 있는 것도, 미륵산의 세 봉우리가 삼회설법을 상징한다는 것도 모두 이같은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미륵산뿐 아니라 미륵도를 둘러싸고 있는 섬도 연화도니 보리도·욕지도 같은 이름으로 불렀나 보다.
미래사서 되짚어 오른 후 용화사까지 이르는 1.5㎞는 등산로라기보다는 산책로에 가깝다. 띠밭등 평원에 앉아 온몸으로 바람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일품이다.
미륵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명산이라면 갖춤직한 덕목을 두루 갖고 있다. 울창한 수림 사이로 계곡이 있고 맑은 물이 사철 끊이지 않고 흐르니 지금도 통영시민들의 식수원이 되고 있다.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과 바위굴이 있고 고찰과 약수가 있다. 봄진달래와 가을단풍이 빼어나다. 통영병꽃이 대규모로 자생하고 있기도 하다. 맑은 날에는 대마도까지 보인다는 정상에서 굽어보는 바다와 섬은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장군의 기상이다.
그렇게 돌아온 용화사 광장에는 여전히 미륵산을 그대로 두라거나 케이블카 설치에 반대한다는 플래카드와 빨랫줄에 빨래걸리듯 걸린 어깨띠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데, 등산을 위해서 또는 지극한 불심으로 산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가롭다.

▶ 찾아가는 길

마산과 진주에서 수시로 있는 직행버스를 타면 통영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린다. 여기서 용화사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다.
차를 갖고 가려면 마산쪽에서는 14번 국도를 타고 통영까지 가면 된다. 진주쪽에서는 사천을 거쳐 고성에서 14번 국도에 올리면 된다. 통영 초입 원문고개에서 국도를 따라 죽 가는 옛 길을 따라가도 되지만 북신만 매립지로 바로 내려가는 새 길이 있는 만큼 이쪽을 이용하는게 편리하다. 매립지를 거쳐 산복도로를 타고 가면 충렬사가 나온다. 이곳 네거리는 구조가 복잡하지만 개념상 직진하는 도로를 따라가면 다시 산복도로를 타고 충무교에 이른다. 충무교를 건너 좌회전한 후 첫 신호에서 오른쪽길로 접어들면 용화사 광장이 나온다. 입장료는 없으며 주차요금은 시간당 11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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