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자연 어우러져 피어나니 추억속의 내님 떠올라

8일 오전 8시 20분. 대우백화점 문화센터가 마련한 ‘상사화가 아름다운 선운사’ 답사길에 나선 40여명은 관광버스를 타고 대우백화점 앞을 출발했다.
운전을 하시는 분 이야기가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있는 선운사까지는 228㎞쯤 된다니 점심시간 전에 도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광주광역시를 지나 호남고속도로 달린다 했으니 광주까지는 익숙한 길일터. 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산과 들의 풍경을 상념에 젖은채 멍하지 바라보기만 했다.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들고, 고속도로와 나란이 이어진 국도인지 지방도인지를 따라 줄지어 피어있는 코스모스꽃을 보고 누군가 “역시 가을 길은 고속도로보다는 지방도로를 달려야 제멋이야” 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행 주제가 ‘상사화가 아름다운 선운다’란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본 상사화는 수선화과에 속한 여러해살이 꽃이다. 한여름까지 활짝 피었던 잎이 지고나면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운다고, 그래서 서로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잎과 꽃이 서로를 그리워한다 해서 ‘상사화’라 한다. 젊은 스님을 사랑한 마을 규수가 있었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다음해 그 규수가 묻힌 자리에서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운 것이 상사화라고. 스님을 그리워하는 처녀의 혼백이 맺힌 꽃이라 한다.
9월말부터 10월 초에 주로 피는데, 기후에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꽃피는 시기를 종잡을 수 없다는 말에‘제발 꽃이 활짝 피어있어얄텐데’ 간절히 기원하면서 12시 30분쯤 선운사에 도착했다.

9월말경 잠시 피고지는 상사화 ‘내년엔 꼭’

사계절 다른 멋 풍기는 절경은 가히 장관


아뿔싸. 너무 늦게 왔구나! 아름드리 편백이며 벚나무며 단풍나무 숲 아래 30㎝쯤 돼보이는 꽃대가 촘촘히 서 있었지만 꽃은 모조리 지고 씨앗이 영글고 있었다. ‘상사화’를 그리며 네시간 너머 걸려 허위허위 달려온 공이 무위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그러고보니 선운사는 계절따라 각기 다른 멋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이른 봄, 대웅보전과 영산전을 북쪽에서 에워싸고 있는 5000여평의 동백림에 꽃망울이 맺히고 활짝 터뜨려지면 마치 꽃병풍을 펼쳐놓은 듯 하겠기에 이를 두고 ‘장관’이라 부를만하지 싶다.
송창식이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예요/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예요…”라고 노래부른 그 동백이다.
설경도 그렇게 빼어나다니 철따라 다른 옷을 입는 우리 강산의 멋을 고스란이 안고 있다고 한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서기 577년)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한다.
악귀를 물리치는 사천왕상의 눈길을 받으며 천왕문을 지나면 앞면 9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인 만세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족히 300평은 됨직한 너른 마당이 있고 비스듬히 영산전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전을 보고 나가다 보면 우람한 만세루에 가려있던 대웅보전이 비로소 보인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그러고보니 이 절에 오래된 건축물은 모두가 맞배지붕으로 돼 있으며 주로 조선 후기의 건축기술이 반영돼 있다.
대웅보전과 영산전 사이에 올라서서 마당을 보고 있자니 몹시 부조화스럽다. 영산전 앞쪽은 널찍한 마당이 펼쳐져 있는데 대웅보전 앞에는 덩치가 더 큰 만세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 답답하다.
대웅보전 왼쪽(동쪽)에는 선운사 금동보살좌상이 안치된 전각이 있다.

사내 맞배지붕 조선후기 건축술 간직해

내주쯤엔 단풍 절정이루니‘양껏 즐겨야’


좌상은 머리에 두건과 비슷한 관을 쓰고 있으며 이마에 넓은 띠를 둘렀는데 귀를 덮고 흘러내려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다. 이같은 복식은 불교에서 쓰이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고려 성종7년에 만들어졌다니 고려시대 사람들의 복식이 이러하지 않았겠나 추측할 수 있다. 일제시대 일본사람이 훔쳐갔던 것을 되찾아 1940년에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선운사에는 창건 설화도 남아 있는데 선운사 자리는 원래 연못이었고 큰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검단선사가 이곳에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웠다. 마침 이 마을에 눈병이 돌았는데 숯을 한가마씩 못에 갖다 부으면 금방 낫고는 해 많은 사람들이 숯과 돌을 져다 부어 금방 못을 메웠다고 한다.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선암사였다. 또다른 설화는 이 지역에 들끓었던 도적을 검단선사가 교화시키고 소금을 굽는 방법을 가르쳐 바닷가에 정착해 살게 했다고 한다. 해방전까지만해도 ‘보은염’이라 해서 해마다 봄에 소금을 절에 갖다 바쳤다고 한다.
선운사가 있는 고창군 부안면 인촌마을에는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남아있다. 한국 현대사의 정치·경제·교육 등에 큰 족적을 남긴 김성수에게 재정적 뒷받침을 해 준 것도 이 일대의 염전이었다고 한다.
동생 수연 김연수는 오늘날 삼양그룹의 모체가 되는 삼양사를 설립했으며 이 일대를 간척해 농장과 염전사업을 벌였으며 형의 고려대 설립을 도왔으니 말이다.
돌아오는 길은 내장사쪽에서 내장산을 넘는 횡단도로를 넘어 백양사로 이르게 잡았다. 역시 너무 일찍 찾아간 탓에 단풍은 구경도 못했다. 마산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다됐다.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허겁지겁 12시간 이상 걸린 셈이다.
아무래도 경남사람들이 찾아가자면 1박2일로 일정을 넉넉하게 잡는게 좋겠다. 단풍은 19일이나 26일쯤이면 양껏 즐길 수 있겠더라.

△가볼만한 곳-고창읍 죽림리 전봉준 생가터

고창읍 죽림리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터로 알려진 곳이 있는데 군이 복원해 뒀으며 옆에는 조각공원도 있다.
고창군 일대는 동학 농민전쟁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는데 공음면 구암리가 농민전쟁의 최초 봉기지점으로 알려져 있다. 또 처음으로 관군과 접전을 벌인 곳도 당시 무장현 관아였으니 외침과 봉건세력의 수탈에 분연히 일어나 싸운 선조들의 얼을 잠시나마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선운사 가는 길에 보면 고창읍성이 자리하고 있다.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자연석 성곽으로 단종 1년에 왜구를 막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여자들이 세웠다고도 하는데 성곽은 4~6 높이에 둘레는 1680m에 이른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데 나주 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다.
고창읍성 옆에는 판소리 여섯마당을 정리해 집대성한 신재효 고택과 판소리 박물관도 있다. ‘귀명창’으로 불리기도 했던 신재효가 제자들을 길러낸 이곳이라지만 ‘가루지기타령’을 아이들과 함께 듣기에는 민망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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