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중앙상임위원회 한덕수 의장(94)은 총련 결성과 더불어 평생을 바쳐온, 총련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1955년 5월 25일 북한정권을 지지하는 재일교포 단체인 총련을 직접 결성하고 초대 의장을 맡은 뒤 무려 46년간(18기) 이 자리를 고수하면서 총련 조직강화와 북한정권 옹호, 재일조선인의 권익과 민족교육 등을 위해 헌신해 왔다.

북한은 총련에 대해 “자주와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내걸고 있는 공화국의 해외공민단체로 조국통일, 민족권리 옹호, 조ㆍ일우호와 세계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1907년 2월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출생한 한 의장은 20세가 되던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민족독립운동 및 노동운동에 가담했다. 일본의 한 대학에서 전문부를 다녔으나 중퇴한 것으로 전해졌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일본공산당에 들어간 그는 같은해 10월 일본공산당 간부였던 김천해 등과 함께 재일본 조선인연맹(조련)을 결성하고 중앙상임위원을 역임했으며 지난 52년부터 조선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그는 조련이 일본 법무성에 의해 강제 해산(1949년)되자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따라 총련 결성준비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총련 출범 이후 초대 의장으로 총련을 김주석의 노선과 정책을 충실히 실현시키는 해외단체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총련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이듬해 총련 산하 대학인 조선대학 학장을 역임한데 이어 지난 68년부터 현재까지 이 대학 명예학장을 겸임해 오고 있다. 한 의장은 일본에서 북한정권을 대변하는 총련의 수장이라는 막중한 역할에 걸맞게 지난 67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10기(1998.7)까지재선됐다.

또 총련의 강화 발전과 북한정권을 위해 헌신해온 공로로 ‘노력영웅’ 칭호를 지난 72년과 82년 2회에 걸쳐,‘김일성훈장’을 3회(72,82,97년)에 걸쳐 각각 받았다.

그는 또 통일투쟁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조국통일상’도 지난 90년 받았다.

북한당국은 특히 지난 95년 평양경공업대학을 한 의장의 이름을 딴 `한덕수경공업대학'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한 의장은 북한의 최고 학위인 원사와 박사이기도 하며 북한 교수 학직도 갖고있다.

한 의장에 대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의 신임도 각별했다.

김 주석과 김 총비서는 한 의장의 방북 때마다 빠짐없이 접견해 주고 총련사업과 관련한 지침을 주었으며 그의 건강과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관심을 표명했다. 지난 94년에는 북한에 장기 체류하면서 병치료를 받도록 배려했다.

김 주석은 이에 앞서 70년대 초 한 의장의 장남인 우철(46)씨 등을 북한에 영주시키도록 하고 차관급의 주택과 생필품을 제공토록 배려했다.

우철씨는 현재 노동당 산하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정무원 부총리 등 고위간부들이 살고 있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의 고급빌라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편 한 의장은 총련사업을 지도하는 와중에서도 좥주체적 해외교포운동의 사상을 실천좦을 비롯해 김 주석과 김 총비서를 찬양하는 여러 편의 저서를 발행했으며200여편의 시와 노래도 창작했다. 특히 김 주석과 김 총비서의 생일이나 노동당 창건 기념일 등 주요 계기 때면 좥김정일 시대의 전성기를 노래합니다좦등 여러 편의헌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작사ㆍ작곡한 「장군님의 사랑은 따사로워라」와 「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 등은 북한과 총련동포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는 명곡으로 알려져 있다.

한 의장의 아내는 몇해전 사망했으며 유족으로는 2남5녀가 있다. 그중 장남 우철씨는 북한 군수공업을 담당한 제2경제위원회 위원장인 김철만 국방위원의 막내딸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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