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은 휴식이 있는 날입니다. 일요일이 우울한 것은 일요일이 일요일답지 않아서입니다. 어떤 상실감, 혹은 열패감 탓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깊은 결핍에 시달린다는 것이죠. 그 결핍은 평소엔 그림자처럼 우리들의 뒷모습에 바짝 붙어있어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근원적 회의가 찾아오는 순간, 결핍은 삶과 죽음을 환치시킬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영화제목(음악)이 월요일이나 화요일이 아닌 ‘일요일의 우울함’인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최소한의 인간성이 충족되지 못하고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음악을 실제 작곡한 레조 세레스가 ‘휴식이 있는 일요일’을 우울해했을 겁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그에겐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꼽힌 연인 헬렌이 있었다는군요.

레조는 헬렌이 자신을 떠나가자 심한 애정결핍에 시달렸고 그때 작곡한 노래가 바로 ‘글루미 선데이’였다고 합니다. 그는 그 노래를 작곡한 후 손가락이 점점 굳어져 마침내는 두 손가락만으로 피아노 연주를 해야 했고 악보조차 읽을 수 없었죠. 고소 공포증이 있어 높은 곳에 설 수 조차 없던 그였지만 기이하게도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죽음의 순간, 그 또한 ‘글루미 선데이’를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롤프 슈벨 감독작)는 총체적인 결핍에 대해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묻고 있기도 합니다.‘글루미 선데이’는 듣는 이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완전이란 없으며 삶은 불완전할 뿐이다, 다만 그 불완전속에 사랑과 존중이 살아있을 때 삶은 견딜만한 것이다, 그대의 삶은 그렇게 충족되어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거든요. 그 질문을 곱씹어보며 근원적 결핍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 둘씩 죽음을 택합니다. 무려 200명 가까이 말입니다.

음악은 이렇듯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안드라스가 일로나의 생일을 축하하며 ‘글루미 선데이’를 만들었지만(영화내용), 음악은 연주되는 순간부터 안드라스의 손을 떠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가지요. 아름다운 여인 일로나와 그녀를 지독히 사랑하는 자보, 피아니스트 안드라스의 특별한 관계를 잇고 있는 것도 ‘글루미 선데이’거든요.

불안했던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이겨버린 2차 세계대전은 ‘글루미 선데이’와 맞물려 우울함을 증폭시킵니다. 안드라스가 자살하고, 자보도 대학살의 행렬로 끌려가버립니다.

그리고 60년이 흐릅니다. 세월의 더께는 ‘글루미 선데이’를 저주받았다는 수식어로 남겨놓고 있지요. 젊은 날 독일군 장교였던 한스는 80회 생일을 맞아 자보레스토랑을 찾습니다. 추억이 깃든 시선으로 실내를 살펴보던 그는 말합니다. “그 노래를 연주해주게.”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그는 돌연 가슴을 쥐어 뜯으며 쓰러집니다. 그때 누군가가 외치죠. ‘이 노래의 저주를 받은 거야.’

주방에선 노래를 흥얼대며 접시를 닦는 노파 일로나가 있습니다. 일로나는 자보와 안드라스를 앗아간(결핍되도록 만든) 한스에게 60년만의 복수를 한 것입니다. 그녀와 음악 ‘글루미 선데이’는 비로소 일치되고, 결핍은 다소나마 덜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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