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소리 마음에 담고 천왕봉에 몸 싣고

지리산 골짜기 중산리에 자리잡은 법계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데 있는 절간이다. 절 자체가 1450m 높이에 있다 보니 대웅전 뒤쪽에 있는 삼층석탑은 자연스레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돌탑이 되고 말았다.
법계사의 중심 법당인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다. 대신 통일신라시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셔 만들었다는 뒤쪽 삼층석탑이 보이도록 유리를 달아두었다.
법계사는 강학이나 참선이 아닌 기도도량이란다. 때마침 법당에서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고 되풀이 외는 스님의 염불 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오는데, 녹음테이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 익숙해진 길손에게는 어쩌면 오히려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가로이 중얼중얼하는 게 아니라 높낮이를 바꿔가며 외치듯이 하는 목소리에서 절절함이 그냥 뭉턱뭉턱 묻어난다.
삼층석탑은 덩치가 커다란 자연바위를 기단 삼아 크지 않은 몸돌 세 개를 차례대로 겹쳐놓았다. 옆에 있는 더 큰 바위에는 한문으로 된 사적기가 나란히 줄지어 적혀 있는데, 그보다 더 큰 글씨로 새겨놓은 무슨무슨 사람 이름들이 흩어져 있어 느낌이 사납다.
고려시대 솜씨로 짐작되는 돌탑은 아래로 시원스레 달리는 지리산 자락을 굽어본다. 뿌연 안개 속에 진주쯤인가 하는 큰 동네도 보이고 맑을 때는 남해까지 눈에 들어온다는 곳이다. 맞은편에는 신라 최치원 선생이 노닐었다는 문창대가 바짝 다가와 있고 뒤쪽에는 구름이 군데군데 핥아먹은 천왕봉이 고개를 치켜들게 한다.
울타리 왼쪽으로 슬쩍 벗어나니 낮은 수풀 속에 너른 바위가 나타난다. 육상산(陸象山)·일출봉(日出峰)이라 새겨져 있는데, 탁 트인 전망 덕분인지 햇살과 바람에 온몸을 뒤척이는 잎새들이 눈 아프게 빛나고 물도 보이지 않건만 골짜기 웅성대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제석봉과 천왕봉·중봉 같은 봉우리들은 빙 둘러서서 어깨를 감싸듯 하고 있고.
법계사를 품에 안은 중산리 계곡은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가장 빨리 가 닿는 길이라 찾는 이가 많다. 물론 여기 모여드는 대부분이 정상까지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가 시원한 그늘 아래 자리를 깔고는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거나 음식을 먹거나 책을 읽는다.
하지만 이렇게만 하면 아무 산 아무 골짜기에서 발을 물에 담그는 일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지리산 자락에 몸을 맡겼으면 지리산‘다움’을 보고 느끼고 만지면 좋겠고, 그러려면 적어도 법계사에는 올라서, 푸르른 숲과 시원한 봉우리와 맑은 물소리를 담는 게 좋겠다.
법계사 오르는 길은 골짜기를 끼고 있기 때문에 시원함이 더하다. 식구끼리 산행을 한다면 칼바위·망바위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길보다는 자연학습원이 있는 순두류쪽으로 골라잡는 편이 더 낫다. 조금 두르긴 하지만 길이 평탄하기 때문이다.
비 온 뒤라서 그런지 풍성한 물이 소리내어 흐른다. 돌로 된 데가 많아서 질척거리지도 않는다. 두세 군데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도 있어서 아이들이 있다면 신이 날만 하겠다. 이쪽저쪽 나무들은 떡버들 함박꽃나무 생강나무 까치박달 신갈나무 돌개회나무 따위 이름표를 매단 채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에 앞서서 단성면 운리 탑동에 있는 단속사지 삼층석탑을 찾는 것도 괜찮겠다. 왠지 모르지만, 동서로 서 있는 두 돌탑은 매우 포근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동네 사람들은 서탑을 암탑 동탑을 수탑이라고 하는데, 관을 썼는지 여부에 따라 갈래 지은 말이다.
이를테면 꼭대기 보개·보륜이 온전히 남아 있는 동탑은 관을 쓴 것이고 망가진 서탑은 민머리에 쪽을 찐 셈이 된다. 이밖에 마을을 이리저리 오가며 들머리 당간지주와 강당터, 600년 된 매화나무(정당매)를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마을 어르신들은 종종 돌탑 앞 평상에 모여 일을 하거나 얘기를 주고받는데 할아버지들은 절터 자취나 유래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말씀을 잘해 주시고 할머니들은 손주나 막내아들 같이 여기고 수제비를 한 그릇 퍼 안기시기도 한다.

△찾아가는 길

중산리 가는 차편은 진주시외버스터미널(055-741-6039)에서 아침 7시부터 밤 9시 10분까지 1시간에 1대꼴로 마련돼 있다.
마산·창원에서 간다면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055-256-1621)에서 아침 6시 10분부터 10시까지 10분마다 있는 진주행 버스로 가서 중산리행 버스로 갈아타면 편하다.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산청 단성면 원지마을로 가는 버스가 아침 6시 30분부터 저녁 5시 10분까지 40~50분마다 있지만 결국은 갈아타야 하니까 아예 진주를 기점 삼아 움직이는 편이 낫다.
자동차로는 남해고속도로를 거쳐 통영~대전 고속도로에 올린 다음 지리산 나들목에서 빠져나온다. 여기서 국도 20호선을 타야 한다. 중산리가 산청에 있다는 것만 생각하고 ‘산청’이라 적힌 표지판을 따라 국도 3호선을 따라가면 안된다.
고속도로의 빠름보다는 국도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이라면 진주에서 국도 3호선을 타거나 마산·창원에서 국도 5호선을 타고 함안까지 나간 다음 지방도 1004호와 국도 67호선을 번갈아 타면서 의령으로 가면 된다. 의령에서 읍내를 오른쪽으로 끼고 20번 국도를 타고 가면 대의고개를 거쳐 산청으로 들어서게 된다.
단속사지는 단성면에서 국도 20호선으로 옮겨 탄 다음 옛집으로 이름난 남사마을을 지나 첫 삼거리에서 청계·입석행 1001번 국도를 따라 10km쯤 가면 왼쪽에 나타난다.

△가볼만한 곳 - 경남·전남의 지리산 계곡

여름이다. 즐거움과 시원함을 찾아 산과 강이나 바다로 떠나는 때다. 사람에게 시달릴 자연에게는 좀 안됐기는 하지만, 살아가려면 한 번쯤은 편히 머물며 쉴 자리가 있어야겠다.
<편집자 designtimesp=7586>


전남 구례 천은사 계곡 : 샘이 숨어 있다는 천은사(泉隱寺). 화엄사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독특한 운치를 간직한 골짜기다. 하동을 지나 19번 국도를 따라 구례로 들어가 광의대교를 타고 죽 달리면 나온다. 절간 수홍루와 극락보전·일주문의 고즈넉함도 새삼스럽다.
전남 구례 피아골 : 피아골은 사철 아름답다. 봄 진달래, 여름 녹음, 가을 단풍, 겨울 눈꽃으로 이어진다.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 계곡물은 숲과 바위를 감돌며 흐른다. 19번 국도를 따라 하동에서 섬진강을 건넌 다음 전남 구례군 토지면 외곡리에서 865번 도로로 바꿔 타면 피아골로 이어진다.
전북 남원 뱀사골 : 우리나라의 으뜸 물줄기라 해도 좋을 만큼 맑고 깨끗하다. 반야봉·삼도봉·토끼봉·명선봉에서 물줄기가 내려오면서 빚어놓은 계곡미 또한 대단하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만 골짜기가 깊고도 길어 뱀사골은 아직도 넉넉하다. 천은사계곡에서 861번 지방도를 타고 성삼재를 넘어도 되고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에서 빠져 산내를 거친 다음 반선으로 들어도 된다.
함양 칠선계곡 : 지리산에서 가장 빼어난 계곡이다. 험난은 하지만 경관은 그 이상 아름답다. 대륙·칠선 폭포 등 폭포 7개가 잇따르고 옥녀탕·비선담을 비롯해 소(沼)만도 33개나 있다. 대전~통영 고속도로 수동나들목에서 빠져나와 60번 도로로 가다가 마천면 의탄리에서 의탄교를 건넌다.
함양 한신계곡 : 함양 마천면 백무동에서 세석평원까지 가파르면서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품은 골짜기다. 첫나들이폭포까지 2km는 우거진 숲과 계곡을 울리는 물소리로 환상의 등산길이라는 말을 듣는다. 또 가내소·오층·한신폭포가 줄줄이 이어진다. 함양에서 칠선계곡 들머리를 지나 마천에서 좌회전해 길 따라 가면 나온다.
하동 대성골 : 하동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가다 화개에서 1023호 지방도로 옮겨타고 간다. 지리산에서 으뜸가는 기도처인데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협곡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대성폭포는 불일폭포보다 낫다고 하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더욱 깨끗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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