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남자, 받는 여자라는 설정 아름답게 형상화

지난해 1월부터 6월말까지 6개월간 ‘예술속의 성’이 문화면에 총 47회까지 연재되었습니다. 이 후 아쉽다는 독자의 반응이 수월찮았고, 또 여름을 기해 이 코너를 다시 부활시켜도 좋겠다는 내부의 합의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격주로 싣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독자 여러분의 애정과 관심 당부드립니다.<기획문화부 designtimesp=7434>

황순원의 ‘소나기’는 아주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어린 시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을 통해 ‘동심을 잘 드러내 보인 작품’으로만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소나기’는 곳곳에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이미지를 감춰두고 있다.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개울 한가운데 앉아 소년이 오기를 기다리던 소녀가 조약돌을 던지고는 갈꽃을 꺾으러 뛰어간다. “소년은 조약돌을 내려다보았다. 물기가 걷혀 있었다. 소년은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날부터) 소녀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구석에는 허전함이 자리잡았고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조약돌을 통해 소년은 소녀의 모습과 마음을 새겼다. 하지만 그뿐, 만남과 그리움으로 나아간 때에는 ‘조약돌’이 나오지 않는다.
소녀에게 남은 소년의 자취는 다르다. “‘그날 참 재밌었어. 근데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본다. 검붉은 진흙물 같은 게 들어 있었다. ‘그날 도랑 건널 때 업힌 일 있지· 그 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 소년은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들판에 놀러갔다가 소나기를 만나 생긴 일이었다. “도랑물이 엄청나게 불어 있었다. 빛마저 붉은 흙탕물이었다. 소년이 등을 돌려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그러안았다.”
남자는 능동, 여자는 수동이라는 성역할에 따른 것이다. 사실은, 소년 소녀가 아니라 작가 황순원이 이 성역할을 작품을 읽는 코드로 작동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남자는 해주는 것으로 기억되고 여자는 받아들이는 것으로 기억된다.
“소년이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두’ 마을갔던 아버지가 ‘윤초시댁두 말이 아니어,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넘기고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사내애 둘은 어려서 잃구 지금 같애서는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소녀도 물론 능동을 한다. 조약돌도 던지고 말도 먼저 걸고 대추도 건네주지만 전혀 도드라지지 않는다. 조약돌의 반짝임도 기껏 둘이 어울리게 하는 데서 멈춘다. 소녀가 건넨 대추는 소년으로 하여금 ‘덕쇠할아버지네’ 호두를 몰래 따게 하는 동기가 될 뿐이다.
소년의 능동은 그렇지 않다. 들판에서 소년은 해 주기만 한다. 진흙물은 소녀의 무덤까지 따라가고 호두는 끝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주는 남자, 받는 여자라는 설정은 수숫대를 벌려 소나기를 긋는 데서 아름답게 형상화된다.
“소녀가 속삭이듯이,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소녀가 안은 꽃묶음이 우그러들었다. 소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소년의 몸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적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아름다움과 좋음이 언제나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소나기’는 50년 전인 1952년 10월 발표됐다. 50년이면 소년이 커서 손주를 보았을 세월이다. 이제 고정된 전통 성역할에 기대지 않고도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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