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즐기고 사랑하며 일상을 살 듯 여행하라
소설가인 저자의 산문집, 여행과 삶 동일시한 접근으로 신뢰와 존중 필요성 고찰

책방 바로 앞에는 두 개의 고등학교가 있다. 1년 정도 이 자리에 있다 보니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하교 시간에 맞춰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로 오후 시간대를 가늠할 수 있다.

얼마 전, 평소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보다 이른 오후 2시 무렵. 얼굴은 앳돼 보였으나 차림새가 꽤나 성숙한, 아니 성숙해 보이려 애쓴 학생들의 무리가 가게 앞을 지나갔다.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지만 커다란 짐가방과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구두가 맞은편 고등학교 학생임을 짐작하게 했다. 아마 수학여행을 다녀온 모양이다.

'내가 수학여행 갈 때도 저런 친구들이 있었는데' 하며 갑자기 떠오른 학창시절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따라 매번 수학여행을 다녀왔는데도 어쩐 일인지 '수학여행'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는 무언가를 학습한 것 같지도, 그렇다고 여행을 한 것 같지도 않다.

첫 수학여행지였던 경복궁에 가서는 비가 온다는 핑계로 버스 안에서 내리지 않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해서도 이런 저런 구실을 대며 버스 안에 앉아 있었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학여행지에서 무언가를 했던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고학년이 되어서도 수학여행을 하는 방법은 비슷했다.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는 여행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겠지만 지금이야 꿈에 그리는 제주도라는 여행지도 그때의 나에겐 어떤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비가 왔던 날의 버스 창문과 한껏 멋을 부린 친구들의 옷차림 정도랄까. 아무래도 이 기억만으로 내가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비여행, 탈여행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여행 방법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영하 작가는 최근 여행과 관련된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펴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주인공 필리 어스 포그는 80일간 세계를 일주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전통적으로 여행이라 부르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수에즈에 도착하지만 배에서 내리지 않고 선실에만 머문다. … 그의 목표는 각각의 여행지 최소한의 시간만 머무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에서 이런 여행을 '비여행' 혹은 '탈여행'이라 불렀다.

김영하 작가가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는 앞서 언급된 나의 수학여행과 같은 '비여행'보다는 '탈여행' 즉,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여행하게 하고 자신이 나중에 그것을 재구성하는 것에 가깝다.

종류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우리 모두는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곳을 '다녀왔다'고 말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여행지의 모든 정보를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그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여행이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완성형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끊임없이 여행을 떠나려 하는 것일까. 습관처럼 '여행가고 싶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김영하 작가의 책 제목처럼 '여행의 이유'를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 소설가 김영하 산문집 <여행의 이유>.

◇존재의 이유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에서는 작가가 경험한 여행의 에피소드들과 여행에 관한 생각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여행 경험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것이 작가에게 주는 의미에 대한 고찰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하 작가는 매년, 때로는 한 해에도 여러 번 여행을 떠나는 생활을 20년간 해왔다. 학창시절에도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말과 풍습이 다른 지역을 마치 방랑하듯, 혹은 여행하듯 지내왔다고 한다.

책에서도 빈번히 언급되지만 작가는 자신의 삶 자체가 긴 여행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여행의 이유에 대한 생각은 책 속에서 자연스럽게 삶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생각으로 연결된다.

이 책 속에서 작가는 '여행의 이유' 를 말하는 것 같지만 다시 곱씹어 읽을수록 작가의 여행은 우리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느낌을 준다.

책 속의 9개의 챕터 가운데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장에서 작가는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가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우리는 서로를, 모든 동식물을, 같은 행성에 탑승한 승객이자 동료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 것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한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여행에 대한 생각은 지구별 여행자로서 우리가 지녀야 할 삶의 태도와도 자연스럽게 접합된다. 그리고 그 점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와 괴물 키클롭스의 이야기를 통해 여행자들의 정체성과 태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여행자의 덕목

오디세우스의 행동을 통해 호메로스가 말하고자 했던 올바른 여행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인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은 현명한 여행을 위한 지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여행하고자 하는 것일까? 정말로 인생과 여행이 닮아있어서 자연스럽게 끌리는 것일까?

<여행의 이유>라는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누군가에게 여행의 이유를 묻는다면 돌아올 것으로 기대되는 답변 가운데는 일상에서 누리지 못하는 것을 얻어오고 싶은 마음 혹은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와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자고로 여행이라 하면 과정이야 어떠하든 어떤 면으로든 깨달음을 얻어와야만 할 것 같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를 짓누르거나 무겁게 하는 것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여행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불확실성이 주는 희열

나는 여행에 큰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안전을 즐기고 반복을 사랑하는, 그래서 때로는 지루하지만 반대로 확실한 보장이 있는 행동을 더 좋아했다. 반면 여행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매번 새로운 선택지를 마주하게 하는 매우 수고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나의 첫 외국여행은 절반은 행복했던 기억으로 절반은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 호되고도 짜릿한 첫 경험을 통해 다음 번 여행에서는 그 모든 불확실성이 주는 희열이야말로 비로소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의 말미에서 김영하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이런 말을 한다.

"'여행의 이유'를 캐다 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저마다의 이유를 가진다. 나에게 여행은 무엇일까? 왜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길 바란다.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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