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였던 우리 아동인권선언문
뿌리도 '사람이 하늘'우리 토착신앙

1994년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정치학술지인 <포린어페어스> 봄호에 싱가포르 총리를 지낸 리콴유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문화는 운명이다(Culture is destiny)'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서 그를 상징하는 개념인 '아시아적 가치'가 등장한다.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가부장적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칼럼이 몹시 못마땅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정계 은퇴 후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해 아시아 지도자 육성에 매진하던 김대중 이사장이었다. 김대중이 보기에 리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자체가 불투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내세운 아시아적 가치가 아시아 나라들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직접 펜을 들었다.

그해 같은 잡지 겨울호에 김대중은 '문화가 운명인가(Is Culture Destiny)?'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를 '아시아 내 반민주주의적 가치의 신화'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김대중은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가치관이 서양보다 2000년이나 앞선 중국의 맹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맹자의 방벌론을 예로 들며 왕이 악정을 하면 국민이 하늘의 이름으로 봉기하여 왕을 몰아낼 수도 있고, 심지어 옳지 않은 왕을 죽일 수도 있다고 했다.

곧이어 한국의 토착신앙인 동학을 소개했다. 동학은 맹자의 왕도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곧 하늘'이고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가르치는 사상이다. 이 가르침에 따라 구한말 학정에 저항하는 농민 전쟁이 일어났다. 김대중은 기고문에서 "문화는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동학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천도교로 진화했다. 천도교가 시작한 여러 활동 중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어린이날'이다. 천도교도였던 소파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어린이날이 1922년에 처음 지켜졌는데, 이는 단순히 복지 수준이 아니라 '인권 선언'이었다. 어른 아닌 아이를 사람 취급하지 않던 그 시대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923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에는 '어린이날 선전문' 12만 장이 인쇄돼 전국에 배포됐다. 어른들과 어린이들, 어린이날의 약속이 명시된 이 전단은 자타 공인 세계 최초의 '아동인권선언문'이었다. 서구사회가 국제연맹을 통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발표한 '아동권리선언'보다 정확하게 1년 앞선 선언문이었다.

선전문에서 밝힌 소년운동의 기초 조건에는 "기존의 윤리적 압박에서 벗어나 어린이를 완전한 인격체로 예우할 것"과 "경제적 압박에서 해방하여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 선전물을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 대우를 하자고 외치는 날이 왔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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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조례 문제로 경남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이니 찬반에 대한 갈등과 토론이 없을 수 없겠다. 다만 어느 쪽 의견이든 학생인권조례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함께 성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학생인권의 개념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물설고 낯선 외국에서 들여온 것도 아니다. 100년 전 우리 선배들은 세계 누구보다도 먼저 '어린이인권'을 외쳤다. 우리의 전통이고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소파 선생이 오늘의 논란을 보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학생이 하늘"이라 외치지 않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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