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서 도망간 아들 용서 않은 김유신
현재 위정자 중 그와 같은 이 누가 있나

우리 한반도의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고대왕국의 성장과 경쟁의 역사다. 가장 나중에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서기 668년 삼국통일을 달성했다. 하지만 바로 당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고, 676년 천신만고 끝에 당나라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은 그 시기 신라가 삼국통일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넘쳐나는 국력을 팽창시켰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실상은 고구려, 백제 양쪽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당하는 처지였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여 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것에 불과하다.

그 당시 신라는 상무정신으로 똘똘 뭉친 나라였다. 특히 화랑은 신라의 인재 양성 기구로서 상무정신의 화신 같은 곳이었다. 많은 화랑과 낭도들이 전쟁에 임해 초개와 같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그들은 현실세계에서 실천하였다. 그런 기풍이 삼국통일 전쟁에 매우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신라는 672년 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석문들판에서 당나라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석문전투). 초반에 일부 부대가 당나라군과 교전해 큰 승리를 거두자 방심한 신라군의 본대는 진도 제대로 치지 않고 공격했다가 오히려 기병으로부터 역습을 당해 붕괴되었다. 그 싸움터에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도 있었다. 원술은 신라군이 붕괴되는 와중에 적진을 향해 돌격하려고 하였지만 하인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말을 타고 도망갔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유신은 대로하여 문무왕에게 원술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진언하였으나 원술의 외삼촌이기도 한 문무왕이 극진히 말려서 겨우 살아나게 되었다.

전군이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고위 지휘관도 아닌 비장에 불과한 원술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는 김유신이 너무 가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고위 지휘관 급에서도 같이 싸우다 동시에 죽는 아버지와 아들이 허다했을 만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주는 나라였다. 석문전투에서 신라군 본영이 무너져 내려가는 상황에서도 일길찬 아진함과 그 아들은 시간을 벌겠다고 자원해서 싸우러 나갔고 결국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김유신은 원술이 임전무퇴를 외치며 무의미한 돌격을 바랐던 것은 아니다. 당시 기병이었던 원술이 진지를 사수하고 역공을 하여 시간을 벌었다면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었음에도 그런 시도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는 것이다. 김유신의 처지에서 보면 원술의 행동은 그가 그동안 부하들에게 내렸던 수많은 명령들, 희생들에 대한 배신과 다를 바 없다. 가장 모범을 보여야 했던 아들의 비겁한 행동을 용서하게 되면 앞으로 어느 부하가 김유신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겠는가. 요샛말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 잣대)이라고 비판받기에 딱 좋은 행동이다.

김유신은 다음 해인 673년 향년 79세로 사망한다. 하지만 원술은 가문의 명예를 훼손한 죄로 본가에 들어가지 못해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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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은 675년 나당전쟁 막바지에 매소성 전투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그랬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내 배에서 태어난 소중한 자식이라 해도 내로남불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던 그 남편에 그 아내였던 것 같다. 과연 현재의 위정자 중에 그 누가 김유신이나 그 아내만큼 내로남불에 엄격하다고 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한 명도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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