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망령 막을 '선거제 개혁' 숙제로
서거 이후 일당독식 경남 정치지형에 변화
신진 정치인들, 노무현 정신 계승작업 계속

도저히 변화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회 현상과 구조가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변모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것이 한 개인에 의해 이뤄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지폈던 불씨가 어느 순간 '끓는 점'을 이끌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게 '전라도 당'과 '경상도 당'이, '충청도 당'이 횡행하던 정치지형은 허물어지고 있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균형발전과 분권의 정신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국가 경영철학이 됐다. 그의 10주기를 맞아 그가 지핀 '지역발전 불씨'를 3회에 걸쳐 조망한다.

2000년 총선 당시 부산에서 출마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이미 '전국구 정치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당연히 보좌진은 낙선이 뻔히 예상되는 부산 출마를 반대했지만, 노무현은 강행했다. 낙선 후 남긴 그의 말은 "부산 사람들을 욕하지 말라"였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가 어디 부산만의 문제인가요? 지역주의가 이기주의와 편견 또는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에서 출발해야 지역주의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자성했다. 총선 부산 출마는 그에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그 '바보'는 결국 깨질 것 같지 않던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 고 노무현(맨 왼쪽) 전 대통령이 2000년 총선 당시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 후보로 나서 선거유세를 하는 모습. /노무현사료관

◇경남 지형을 바꿨다 = 1년 전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경남 민심은 정치 평론가들로부터 '상전벽해'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김경수 도지사를 필두로 양산·김해·창원·고성·통영·거제 등 경남동부벨트 기초단체장직 전부를 더불어민주당에서 차지했다. 서부경남인 남해에서도 더불어민주당 소속 단체장이 탄생했다. 경남도의회 총 58석 중 민주당이 34석을 석권했다. 도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자치단체 의회인 창원시의회에서도 민주당 소속 의원이 21명에 이르러 자유한국당(21석)과 균형을 맞췄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았던 반면 자유한국당으로서는 탄핵 정당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역부족이었던 상황이었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경남지역 투표 결과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 이를 두고 '지역감정이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동안의 선거 추이를 감안한다면 경남 정치판에서의 '지역감정' 희석화는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부터 2007년에 이르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 지역 토호 세력이 대거 여당행을 택하긴 했으나, 오히려 이때 지역감정은 더욱 노골화됐다.

서거 이듬해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는 노 대통령 필생의 정치 프로젝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감정 해소의 단초가 드러났다. 참여정부 시절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김두관 국회의원(김포 갑)이 무소속으로 경남도지사에 당선됐다. 김 의원은 이전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당적 등으로 끊임없이 출마하면서 지역감정의 벽을 넘어서려 했기에 '리틀 노무현'이라는 수식이 붙었다.

광역의회와 기초의회에서도 대거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탄생했다. 노 대통령 서거가 안겨다 준 충격, 그가 꿈꿨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실천하려 했던 신진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무현을 계승하는 사람들 = 2010년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의원으로 당선된 공윤권 경남교통문화연수원장은 '잘나가던 증권맨'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2009년 '시민 상주'로 나섰던 공 원장에게 '정치'는 곧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었다.

현재 경남도청에서 김경수 지사를 보좌하는 명희진 정무특보 역시 평범한 세일즈맨에서 경남도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명 특보에게는 우연히 노 대통령과 함께한 장시간의 '담배 미팅'이 지금까지도 정치인의 길을 비춰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돈과 단체를 등에 업어야만 가능했던 정치 행태가 서서히 바뀌는 시기였다. 노무현과 끊임없이 조응하려 했던 신진 정치인들이 급부상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인 김경수 지사와 '봉하마을 농사꾼' 김정호 국회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1980년대 학생·노동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노무현·문재인'의 변호를 받았던 정치인들이 경남의 전면에 나섰다. 허성무 창원시장과 여영국 국회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서 노무현을 정치에 이용한다는 비판이 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경남에서 민주당 당선자가 많이 배출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지역감정 타파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많다. 노 전 대통령이 일으킨 바람이 거세지고는 있지만 어느 순간 미풍으로 돌아설지도 모를 일이다.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재욱 교수(경남대 정치외교학과)는 "지역감정을 넘어서기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고투가 경남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사를 변화시킨 건 분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제도적 기반은 마련되지 못했고, 향후 선거에서 지역감정이 되살아날 가능성도 충분하다"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통한 선거제도 개혁 없이는 노 대통령의 지역감정 타파 정신도 완성될 수 없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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