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와 걸으며 삶의 방향키 바로잡은 시간

기차를 타서 앉는 방향에 따라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탈리아에 와서의 일이다. 기차가 가는 방향으로 앉을 경우에는 풍경이 다가와 사라지기가 바쁘지만 기차의 진행방향과 반대로 앉을 때에는 풍경이 내게 오래 머무는 것이다. 시야가 그만큼 넓은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의 잔상효과일 수 있다. 피사에서 제노바로 오는 기차는 지정석인 바람에 기차의 진행방향과 반대로 앉게 되었는데 늘 진행방향으로 앉아오던 습관에서 벗어나니 사라지는 풍경이 내게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기차여행을 통하여 자주 잔상을 즐기게 된 것도 하나의 소득이라면 소득 아닐까? 사라지는 것들은 늘 긴 꼬리를 가졌는가 보다. 나의 시집 <바람의 지문>에는 마침 이런 시가 있다.

'나이 오십 줄에'

가끔씩 / 거꾸로 가면 자유가 몰려오지 / 뒷걸음질로 걸어가면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지 / 눈의 가림막이 철거되고 / 옭아맸던 올무에서 풀려나고/ 가야만 했던 길에서 해방되어 가고 싶은 길을 가게 되지/ 이제 알았다

내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탄 열차는 피아젠차(Piacenza)역에서 3시 50분에 출발하여 밀라노 중앙역(Milano Centrale)에 4시40분에 도착하는 레지오날레 벨로체(Regionale Veloce) 2282호였다. <냉정과 열정 사이> 영화를 근 열 번 정도 돌려 봤던 추억이 함께한 장소인 밀라노 중앙역,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영화의 장면들을 그려보면서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이 영화의 음악도 좋아해서 아직껏 내 블로그의 배경음악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결국 냉정했던 아이오와 뜨겁도록 열정적이었던 준세이 그 둘을 하나의 용광로 속으로 빨려 들게 한 곳이 바로 이곳 '밀라노 첸트랄레'였다.

밀라노 체류 둘째 날 저녁에 밀라노 중앙역으로 나갔다. 티켓이 없이는 플랫폼으로 갈 수 없기에 게이트 밖에서 여행자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들어가고 또 기차에서 내려 역사로 들어와 계단을 통해서 시내로 빠져 나가는 모습을 한 시간 가까이 지켜보았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저 속에 있었다.

특급열차를 타기도 하고 완행열차를 타기도 했을 저 사람들, 여행의 목적도 가지가지일 것이다. 동에서 온 사람, 서에서 온 사람, 남과 북에서 온 사람, 인종도, 피부도, 언어도, 복장도 다른 사람들이 다른 열차를 타고 왔어도 같은 플랫폼을 통해서 빠져 나오고 있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결국 종착지에서는 같은 플랫폼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 밀라노 외곽의 피아젠차(Piacenza) 거리와 역 플랫폼. /조문환 시민기자

◇잠행

1786년 9월 3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몰래 빠져나온 괴테는 베네치아와 로마,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돌아 9개월 만인 1787년 6월 8일 다시 로마로 돌아온 후 1년 가까이 그곳에서 유학을 했다. 인생 선택의 기로에서 고위 관리와 유명한 작가의 삶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했던 괴테, 결국 잠행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이탈리아를 만나고 그 속에서 결국 그 자신을 만난다. 베네치아에서 예술적 가치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로마에서 역사의 원음을 듣고 원본을 봄에서, 나폴리의 깨어 있는 원시의 자연 속에서, 흐트러져 있지만 그 속에서 이탈리아의 영혼을 만났던 시칠리아를 만난 것에서였다.

괴테의 여정을 통해서 한 사람의 인간성과 그 내면의 갈등과 고독을 엿볼 수 있었다.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괴테도 어떤 면에서는 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했던 한 인간이었다는 것에 그도 언제든지 내 편에 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번 여행으로 그를 알게 된 것이라면 그도 고독했고, 그 자신을 자각하려고 몸부림 쳤으며, 그 자각의 몸부림이 일어난 곳이 이탈리아였다는 것과, 결국 이런 인생 여정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괴테가 되었다는 것 정도다.

껍질을 벗기면 벗길수록 더 질기고, 전혀 다른 색상의 괴테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그가 로마를 보면 볼수록 저 멀리로 도망 가 버린 로마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의 갈등 속에 나 또한 깊이 침잠했던 시간이었다. 그의 갈등과 함께하여 괴로웠던 시간이자 나 또한 그 속에 함께 있었던 것이 기쁨이었던 시간이었다. 그가 우리 인류의 선조였다는 것에 감사를 느낀다.

▲ 밀라노 대성당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과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에 이어 규모로서는 세 번째 크기다. 이 광장은 일종의 만남의 광장이다. /조문환 시민기자

◇중년의 방황

나에게도 중년의 방황이라는 것이 다가왔다. "이대로 살 것인가"라는 것. 이대로 산다고 한들 누구도 내게 왜 그렇게 사느냐고 말할 사람이 없겠지만 선택을 강요하는 이 질문은 끝이 없었다. 단 한 번의 인생에서 제대로 된 도전 한 번 시도하지 않은 것이 인생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몇 개월의 여행으로 그 물음에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단, 이 결정이 나의 남은 인생 여정에 또 다른 물꼬를 트고 그 물이 흐르는 대로 나의 삶을 흐르게 한다는 것, 그 흐르는 물이 대하를 만나고, 대양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에 나의 이번 여행의 의미를 두고 싶다.

3개월간의 여행에서 나는 체면과 같은 것은 다 내려놓았다. 이국땅에서 장기 여행자로 살기 위해서는 요즘 말로 '폼생폼사'는 자신만 피곤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설사 '폼생폼사'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봐 줄 사람이 없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 나의 몰골과 행동거지를 자세히 지켜봤다면 웃어도 한 참 웃었을 것이다. 배낭을 짊어지고 뒤뚱뒤뚱 걷거나 뛰어가는 모습, 그 어눌한 보디랭귀지, 기차역 구석 어느 즈음에 쪼그려 앉아 생존을 위해 마른 빵 한 조각 삼키는 모습, 레지오날레 완행열차 안에서 혼이 나간 사람처럼 차창 밖을 응시하는 그 얼빠진 자태, 내가 밀라노 중앙역에서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듯이 누군가 내가 하는 행동이 우스워 물끄러미 지켜보았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나를 지켜 봐 주신 분들이 있었다. 나의 가족, 교회 식구들, 동고동락 했던 동료들, 친구들, 이웃들, 형제들, 그리고 나를 아는 분들의 관심과 응원이 없었다면 이 여정이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블로그에서도 응원이 있었다. 특히 '사르데냐'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은 현재 이탈리아 사르데냐에 사시는 분인데 내 블로그로 찾아오셔서 가는 도시마다 격려를 해 주셨다.

나의 이탈리아 여행에 베이스캠프로서 오스트리아 여정을 준비해 주신 오현주, 이미희 선생님 그리고 김동언 교수님 내외분께 감사드린다. 나의 여정을 정리한 책 <괴테 따라 이탈리아·로마 인문기행>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 리얼북스 최병윤 대표께도 감사를 드린다. 1년 4개월여 동안 작지 않은 지면을 허락해 준 <경남도민일보>와 편집을 맡아 준 담당기자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여정 속에 만났던 민박 주인들에게도 고마움의 말을 남긴다. 그들의 친절함에 이탈리아가 그리 낯선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밀라노 시내를 휘감아 도는 트램. 이것만으로도 도시의 그림이 되기도 한다.

◇일상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밀라노에서 기차로 50분 거리에 있는 피아첸차를 다녀왔다. 다른 도시들에서 볼 수 없었던 따뜻한 가을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의 많은 도시들 가운데 이런 도시가 있다니, 도시가 이보다 더 좋을 수도, 더 좋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3시 50분에 밀라노로 향하는 완행열차는 차장의 호각 소리가 나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퀴를 굴렸다.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 간다. 한동안 '일상'이 되었던 여행지를 떠나 내일이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잘 있거라 이탈리아여! 한 때 나의 일상이었던 땅이여! 3일 동안 묵었던 알베르토호텔 옆 밀라노 중앙역의 플랫폼에서 차장이 부는 호각 소리가 들린다. 열차는 또다시 떠나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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