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창단한 마산군, 고교 선수 육성 밑거름 역할
사업가 옥종수 씨가 만든 팀…창단 6개월 만 전국 순회 전승

◇1930년대 '친선야구 붐' = '마산 야구'는 1914년 창신학교 야구부 결성을 시작으로, 1921년 마산구락부 운동장 조성, 1926년 마산 구성야구단 창단 등을 거듭하며 1920년대를 건너왔다. 이러한 '축적의 시간'이 있었던 만큼 1930년대도 '마산 야구' 수준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당시엔 서울 등 전국대회에서 뚜렷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려운 걸 보면, 1945년 해방 전까지 '마산 야구'는 지역 중심 '친선야구'를 활발히 펼친 것으로 보인다.

경남야구협회 상임고문을 지낸 고 김상대 씨는 살아생전 이런 증언을 했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였으니까 1934년께였을 겁니다. 옛 마산소방서 앞에 마산 중앙운동장(1926년 1월 26일 완공)이 있었죠. 그때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제비(쓰바메)야구단과 일본인 야구단이 친선경기를 자주 벌였습니다.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제비야구단에 이어 해방 전까지 마산에서 이름 알려진 야구단은 '나카무라 야구단'이 꼽힌다. '나카무라 야구단'은 함안군 군북면에 있는 나카무라 광업소의 광산주인 나카무라가 창단했다. 기록에는 그가 '야구광'이었으며, 한국인·일본인 가리지 않고 우수 선수를 스카우트해 월급을 주며 팀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나카무라야구단에는 진재호(마산용마고 14회)가 감독 겸 우익수로 뛰었으며, 국가대표 선수와 감독을 역임한 김계현(마산용마고 16회)이 유격수로 뛰었다.

제비야구단과 나카무라 야구단 외에도 당시 마산에는 기관고(철도)·우체국·세무서에서 팀을 운영했고, 마산중에도 야구팀이 있었다. 이런 야구 저변이 있었기에 1936년 4월 5일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동아일보> 마산지국 주최로 제2회 전마산 노동야구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 1936년 4월 5일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동아일보 마산지국 주최로 제2회 전마산 노동야구대회가 열렸다는 당시 4월 8일 자 <동아일보> 기사.

◇해방 이후 전국 무대 진출 본격화 = '마산 야구'가 본격적으로 전국무대에 눈 돌리기 시작한 건 해방 이후부터다. 여기에 앞장선 인물이 바로 초대 마산시장을 지낸 옥기환 씨 장남인 옥종수 씨다. 그는 당시 마산에서 '도정공장'을 운영하며 마산에 야구단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당시 서울에 있던 이경구 씨를 감독으로 초빙했던 것이다. 이 감독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지금으로 치면 국가대표인 전조선대표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1946년 조선야구협회가 창설되자 초대 이사를 맡기도 했다.

1946년 3월 하순 창단한 마산군에서 1루수로 뛰었던 고 고광적 씨 얘기다.

"이 감독은 젊은 시절 야구 외에도 축구·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습니다. 키가 작아 '다마꼬'라는 별명이 붙었죠. 훈련은 엄하게 시켰지만 인정이 많았고 평소 선수들과 친구처럼 어울렸습니다."

당시 옥종수 씨가 마산군 단장을 맡아 뒷바라지를 했다. 마산군은 3개월 동안 훈련을 한 뒤 1946년 6월 경성(서울)에서 자유신문사와 조선야구협회 공동 주최로 열린 제1회 월계기 쟁탈 전국도시대항대회(6월 7~12일 경성운동장)에 출전했다. 이 대회는 경성을 비롯해 부산·마산·대구·대전·광주·전주·군산·개성·인천·춘천 등 11개 도시 팀이 참가한 가운데 4일간 토너먼트로 열렸다.

마산군은 1차전에서 전주군을 4-2로 꺾고 준준결승전인 2차전에 진출했지만, 경성군에 1-12로 대패했다. 마산군은 같은 해 7월 12·13일 부산·마산에서 이재(罹災·재해를 입은) 동포 구호금 모금을 위한 야구경기를 벌인다. 두 경기 모두 12회 연장전 끝에 승부가 갈렸다. 부산에서 벌어진 첫 경기에서는 부산군이 12회말 1-1 동점에서 1점을 뽑아 2-1로 승리했지만, 마산경기에서는 12회말 마산군이 5-5 동점에서 2점을 뽑아 7-5로 부산군을 물리쳐 1승1패를 기록했다.

◇1946년 9월 전국 순회 경기서 '전승' = 마산군은 이후 남한을 일주하는 '전국 순회경기'를 벌인다. 앞서 언급한 옥종수 단장의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산군은 1946년 9월 20일 마산을 출발, 대전(9월 21일), 전주(9월 22일), 군산(9월 24일)에서 경기를 벌였고, 연속해서 이겼다. 마산군은 격변기였던 당시 정치·사회적 혼란 여파로 열차를 타지 못하고 트럭으로 경성으로 향한다. 마산군은 경성에서 곧바로 개성(9월 27일)으로 가 경기를 마치고 인천(9월 29일)을 거쳐 경성을 찾아 식산은행과 경성군을 상대로 2연전을 벌인다. 10월 1일 맞붙은 식산은행은 한성실업연맹이 주최한 추계실업리그에서 우승한 강팀임에도 마산군은 7-0으로 승리했다. 이튿날인 10월 2일 경성군을 상대로도 3-0으로 이겨 '전승으로 순회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산으로 떠나기 직전 주한 미군 팀 도전도 받아들여 10월 5일 경성운동장에서 주한 미군팀을 7-4로 격파했다.

하지만 마산군은 곧 해체됐다. 당시 선수 가운데 좌익 정치활동에 가담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좌우 갈등' 불똥이 야구로도 옮겨붙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경구 감독은 1947년 제2회 전국도시대항대회(8월 7~13일 경성운동장)를 앞두고 선수들을 불러 모은다. 이 대회에서 마산군은 2회전에서 경성군에 0-4로 져 탈락했다. 이듬해인 제3회 대회에서도 역시 1회전에서 인천군에 3-10으로 무릎을 꿇었다. 얼마나 분했으면 당시 유격수였던 김계현은 슬럼프에서 벗어나고자 이름을 김행철로 바꾸기도 했다. '절치부심'이 통했기 때문이었을까. 마산군은 1949년 제4회 전국도시대항대회(6월 16일 서울운동장)에서 연승을 하며 인천군을 꺾고 마침내 결승전에 진출해 서울군과 일전을 벌인다. 하지만, 접전 끝에 2-3으로 져 아깝게 준우승을 차지했다.

◇고교 선수 육성 꿈틀 = 이런 흐름 속에서 1947년 마산상업중학교(현 마산용마고)와 마산중학교(현 마산고)에 야구부가 창단한다. 마산에 본격적인 '고교야구 시대'가 열린 것이다.

두 마산군 선수 출신이 '밀알'이 됐다. 마산상업중 야구부는 마산군 1번 타자였던 박상권 씨가 사재를 털어 만들었고, 마산중은 마산군 유격수 출신인 김계현 씨가 초대 감독을 맡는다.

고교 야구 시작은 취미나 친선이 아닌 학교 명예를 걸고 체계적인 훈련과 엘리트 선수 영입 등이 본격화됨을 의미한다. 물론 해방 전에도 마산상업중 출신이 선수 생활을 했지만, 이는 개인적인 활동 수준이었다. 마산중에도 야구부가 있었지만 모두 일본인 학생들로 짜여 '야구사 속에 넣을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성길(93) 옹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전했다.

"당시 마산상업중학교에 오코야마라는 부기 선생이 있었어요. 이 선생이 야구를 엄청 좋아했던 거죠. 토요일마다 학생들을 모아서 야구를 시켰어요. 그냥 동네야구식으로 하는 거죠. 그게 쭉 이어졌던 것도 아니고, 중간에 끊겼습니다. 해방 이후 1947년을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야구부 정식 출발로 보면 됩니다. 그때 박상권 씨가 지금 마산 남성동에 집을 얻어서 마산상고 학생들을 먹여 살리면서 야구부를 키워나갔죠."

변종민(59) 전 마산용마고 총동창회 사무총장 또한 이렇게 말했다.

"마산용마고 창단이 1936년으로 돼 있기도 합니다. 이 당시 마산상업중 출신들이 개인자격으로 야구선수로 뛴 건 맞지만, 학교 차원에서 대회에 출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1947년을 마산용마고 창단으로 바로잡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두 학교 가운데 창단 이후 전국규모 대회에 처음 출전한 학교는 마산상업중이었다. 마산상업중은 1949년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쌍룡기(현 화랑기) 쟁탈 전국고교대회에 출전해 1회전에서 경남중(현 경남고)에 0-5로 패해 탈락했다. 이 대회 입장식에서 마산상업중 주장 이호헌(당시엔 이정렬)이 선수 대표로 선서를 하기도 했다.

마산상업중 야구부가 초창기 뿌리내리는 데는 박상권 씨 역할이 컸다. 고 이호헌 전 KBO 사무차장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박상권 씨는 어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친 재력으로 일본대학을 졸업, 쇼쿠치 구락부와 만주 다롄실업 팀에서 선수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야구를 잘했어요. 일본대부속중학 때는 전일본소년선발군에 뽑힐 정도였어요. 해방을 맞아 고향 마산으로 돌아온 박상권 씨는 어장을 경영하며 마산상업 야구 육성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선수들을 집에서 먹이고 재울 정도로 정성을 쏟았죠."

※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마산시사>, 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한국 야구사 연표>, 홍순일 편저, KBO·대한야구협회, 2013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디지털창원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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