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전 조선 야구대회'설명
실제 마산 야구팀은 참가 안 해
정확한 시기·내용 파악 어려워

'마산 야구'는 1914년 창신학교를 시작으로 긴 세월을 이어왔다. 하지만 1940년대까지 관련 사진을 찾기 어렵다. 단 하나가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 야구 100년 기념 표지석'에는 사진 세 장을 담고 있는데, 특히 눈에 들어오는 하나가 있다. 12명이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다. 이들은 'MASAN'이라는 글자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있다. 윗줄 가운데 사람은 유일하게 사복 차림을 하고 있다.

'표지석'은 이 사진에 대해 '1922년 전 조선 야구대회에 참가한 마산 선수들'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또한 표지석이 참고로 한 <마산시 체육사>에도 똑같은 설명글이 달려 있다.

하지만 이 사진 설명은 오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마산 야구팀은 1922년 전 조선야구대회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조선 야구대회'는 오늘날 전국체육대회 시초이기도 하다. 1920년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해마다 서울에서 열렸다.

1922년 제3회 대회는 10월 14일부터 4일간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현 배재중·고) 운동장에서 개최됐다.

<한국 야구사 연표>는 1922년 참가 팀을 기록해 놓고 있다. 중학단 팀은 모두 8개로 숭실학교·송도고보·오산고보·계성학교·경신학교·휘문고보·배재고보·중앙고보다. 청년단 팀은 모두 6개로 중앙체육단·배재구락부·숭실대·연희전문·반도청년회·대구청년회다.

▲ 이 사진은 '마산 야구' 초창기 관련 사진으로는 유일하다. 이 사진은 애초 '1922년 전 조선 야구대회에 참가한 마산 선수들'로 알려졌지만 여기에는 오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경남야구협회

'마산 야구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동아일보> 1922년 10월 28일 자 기사가 관련해 명확히 확인해 준다.

'이번 대회에 남조선의 패자(覇者·운동 경기나 어느 분야에서 으뜸이 되는 사람 또는 단체) 마산이 참가치 못한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풍문으로 듣건대 일본인 팀과의 시합에 투수는 어깨를 상하고 야수는 다리를 상하여 참가하지 못하였다 하니, 마산청년제군은 얼마나 비탄을 느끼겠습니까.'

즉 '마산 야구팀'은 1922년 '전 조선 야구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사진이 '1922년 전 조선 야구대회에 참가한 마산 선수들'로 알려진 까닭이 뭘까. '마산 야구 100년 기념 표지석' 건립, <마산시 체육사> 집필에 참여한 주요 관계자들에게 물어봤지만, 또렷한 이유를 찾진 못했다.

경남야구협회 자료에 따르면, 마산 야구팀은 1922년 또 다른 대회에 참가한 기록도 없다. 또한 마산팀은 1922년뿐만 아니라 그 전후로도 '전 조선 야구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이 사진이 담고 있는 정확한 시기·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박영주(59) 지역사 연구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진 왼쪽에 있는 선수가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당시 이러한 기를 제작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팀기'보다는 '대회기'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리고 이 당시 남아 있는 사진 대부분은 신문사 자료들입니다."

1920년대 '마산 야구'는 주로 친선 경기 위주였다. 그런데 경남야구협회 기록을 보면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1921년 9월, 창신학교 운동장에서 3개 팀 참여로 열린 '마산야구대회'다. 마산구락부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지사가 후원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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