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위해 맨홀 들어간 추기경
정의·평화 품은 현실판 열혈사제

저는 연속극을 잘 보지 않습니다. 시간에 얽매이는 게 싫어서입니다. 좋아하는 연속극들(<응답하라 1994>, <나의 아저씨>, <미스터 션샤인> 등)을 보다 보면 시간에 얽매이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뭘 하다가도 그 시간이 다가오면 마음이 급해지고, 심지어 사람 만나는 약속도 그 시간을 피해서 가지게 됩니다. 또 다음 편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좋아한다 싶은 게 있으면 폭 빠지는 성격 때문에 재미있다는 연속극이라도 보기가 망설여집니다.

이미 종영되었지만 <열혈사제>라는 드라마가 재미가 있었는지, 사제인 저를 보면 "그 드라마 보셨습니까?"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주변에도 그런 열혈사제가 계시는지, 아니 계시면 좋겠다"라고 말씀들 하십니다. 저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쭉 훑어보았습니다. 과연 어떤 드라마인지, 어떤 신부님께서 사람들이 바라는 '열혈사제'인지. 사람들이 만나고 싶은 '열혈사제'는 세상 정의를 실현하는 분이었습니다. 세상 속에 섞여 살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 악에 길들기보다 악을 바로잡고자 하는 모습. 어쩌면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지만, 삶의 주변 환경(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봐, 자식 키우랴, 배우자가 등짝을 때릴까 겁나서 등)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할지라도, 종교인인 가톨릭 사제만이라도 그렇게 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의 '열혈사제'가 나타났습니다. '산타클로스는 굴뚝으로, 추기경은 맨홀 속으로'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가 나왔습니다. 사연인즉, 이탈리아에서 어린이 100여 명을 포함한 450여 명의 노숙자가 사는 정부 소유의 빈 건물에 정부가 전기를 끊어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에 교황청 자선 활동을 총괄하는 콘라트 크라예프스키 추기경께서 몸소 맨홀 속으로 들어가 계량기 봉인을 뜯고 스위치를 올린 것입니다. 크라예프스키 추기경은 노숙자들을 위해서 '업무방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이탈리아 정부가 문제 삼자 크라예프스키 추기경은 "계량기를 돌리려고 직접 뛰어들었다. 절박한 행동이었다. 어린이들을 비롯한 400명이 전기 없이 살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추기경은 법적 책임 문제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확신에 따라 행동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내 무허가 난민촌 철거를 주도해온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내무장관은 밀린 전기료 30만 유로(약 4억 원)는 추기경이 대신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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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고 그른지 쉽게 판단하기 힘든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추기경님의 이런 무모한 행동이 멋지지 않습니까? 먼 나라 이야기지만 현실판 '열혈사제'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열혈사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종교인인 사제도 세상 법과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론 정의와 평화를 품은 열정으로 사는 '열혈사제'가 보고 싶습니다. 저요? 저는 '그냥사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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