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강제단속 추락 사고 대법 산재 승소까지 끈질긴 보도

독자와 지역사회에 유의미한 경남도민일보의 역사를 여기에 기록합니다. 세 가지 뼈대를 갖고 정리한 약사(略史)입니다.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언론으로 어떻게 성장해왔나, 지역사회에는 어떤 역할을 해왔나? 끝으로 독자와 어떻게 교감했고, 어떤 평가를 받아왔나? 1999년 창간 전후부터 2018년까지 모두 10편으로 정리합니다.

2005년 신년호(1월 1일 자)에는 신년기획 머리기사를 압도하는 기사가 눈길을 잡는다. '본사 신문협회 탈퇴 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회원사 최초로 한국신문협회 개혁을 촉구하며 탈퇴 선언한 내용을 담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국 언론계 시선은 다시 경남도민일보로 집중된다.

◇올바른 언론 향한 '행진' = 탈퇴 성명 발표에 이어 1월 3일 차판암 대표이사는 한국신문협회 탈퇴서에 서명을 한다. 당시 전국 140개 일간신문과 통신사 가운데 유력 언론으로 인정받는 50개사를 회원사로 둔 한국신문협회. 경남도민일보는 2001년 8월 이 협회에 가입한다. 여러 조건을 맞춰야 하고 회원사들 승인을 받아야 하기에 가입 역시 쉽지 않다. 어렵게 가입한 협회를 채 4년도 되지 않아 탈퇴한 이유는 뭘까?

성명과 기사는 "언론개혁이 만신창이가 된 것은 족벌언론과 재벌언론의 발목 잡기 때문이며 그 중심에는 그들의 이익만을 철저히 대변해온 한국신문협회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가 탈퇴를 보도한 1월 1일 국회에서는 '정기간행물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한 '신문법'이 통과하게 된다.

당시 많은 언론인과 시민단체는 언론개혁을 위해 '사주의 소유지분 분산', '시장지배적 사업자 규정'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법안에서 빠지거나 유명무실해지면서 신문법은 '껍데기'로 전락했다. 경남도민일보는 한국신문협회의 '발목 잡기'와 '딴죽걸기'를 가장 큰 원인으로 판단했다.

신문협회 탈퇴 소식은 방송사, 인터넷 매체가 앞다퉈 보도하면서 '신문사의 4·19혁명'으로까지 평가받게 된다. 독자와 누리꾼 찬사도 잇따랐다. 또 언론노조와 언론운동시민단체의 '신문협회 탈퇴 운동'으로 이어졌지만 아쉽게도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치고 만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신문협회는 건재하며 크게 바뀐 게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같은 해 8월 19일 경남도민일보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평가에서 최우수(A등급) 등급을 받는다. '지역신문발전지원특별법'에 따라 처음 시행된 평가이며 부산일보, 국제신문, 인천일보, 한라신문 등 5개사가 우선지원대상으로 선정됐다. 당시 지역신문발전위는 건전성, 청렴성, 안정성, 실행의지 등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전국 지역일간지 37곳 신청사 중 5곳을 최우수 신문사로 뽑았다. '사이비 지역신문은 퇴출하고 신문다운 신문을 가려내 적극 지원함으로써 지역언론 발전과 개혁을 이끌어 낸다'는 지역신문지원특별법 제정 취지에 비춰보면 '최우수' 의미가 가볍지 않다.

이듬해 우선지원대상사가 18곳으로, 올해 25곳으로 대폭 늘어나면서 '나눠먹기식 지원', '옥석 가리기 실패'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경남도민일보는 15년 연속으로 선정됐다.

▲ 지난 2006년 7월 출입국관리사무소 강제단속을 피하다 추락해 중태에 빠진 이주노동자 장슈아이 씨의 부모가 근로복지공단 창원지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장면. /경남도민일보 DB

◇'약한 자의 힘' 각인 발걸음 = '약한 자의 힘' 사시를 실현한 대표적인 보도를 꼽으라면 본사 기자 중 '장슈아이' 사건이라고 답하는 이가 적지 않다. '장슈아이'는 중국 출신 미등록(불법체류) 이주노동자 이름이다. 스무 살이었던 그는 2006년 5월 2일 창원 성주동의 한 공장에서 출입국관리사무소 단속을 피해 달아나다 6m 높이에서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친다.(5월 4일 자 이시우 기자 보도).

장 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속보로 이어졌고, 경남도민일보 노동조합이 가장 먼저 성금모금에 나선다. 도내 각계각층에서도 이에 호응해 모두 189명(단체 포함)이 '십시일반' 1894만 원을 모아서 전달하기에 이른다.

장 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문제를 지적한 보도와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기사가 이어졌고, 장 씨는 2년 반이 넘는 힘겨운 소송 끝에 2008년 11월 대법원에서 승소한다.

건강을 회복한 장 씨는 2012년 7월 중국으로 돌아갔다. 6년이 넘는 기간 이시우, 이서후, 강진우, 김성찬, 유은상, 민병욱, 최윤영 등 7명 기자가 기사를 썼고 경남도민일보 홈페이지에서 '장슈아이'로 검색하면 70여 건 기사가 나온다.

장슈아이와 그의 부모는 2008년 대법원 승소 이후와 2012년 중국 고향에 돌아가기 전 두차례 본사를 방문해 감사인사를 전한바 있다.

▲ 2008년 12월 장슈아이 씨가 본사를 찾아 감사의 뜻을 전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장면. /경남도민일보 DB

비슷한 시기 '고교 민주화 퇴학생 4명의 명예 회복 요구' 기사 또한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해 6월 5일 자 1면에 '사과받고 떳떳하게 복학하겠다'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됐다.

김성찬 기자는 이렇게 썼다. '91년 5월 스승의 날을 맞아 경남대에서 '해직교사 만남의 날'과 '마산·창원 민주고등학생 연합회(마창고협) 3기 출범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칙을 어겼다며 학교에서 쫓겨난 4명, 지난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모두 인정받게 됐다. 이들은 퇴학 후 '잃어버린 15년'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한다. 학교의 사과와 복학, 졸업 등 그들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이후 이들 요구는 학교 거부로 난항을 겪지만 같은 달 30일까지 11번 연속 보도로 지지 여론이 형성된다. 결국 학교는 사과를 하고 이들의 복학과 졸업 절차가 이뤄진다. 김성찬 기자는 이 보도로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앞서 2005년 9월 보도된 김훤주 기자의 '우포 하늘에 따오기를…' 기획보도도 지금 시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1. 왜 따오기인가', '2. 따오기를 위한 중국의 노력', '3. 일본 따오기의 현황', '4. 따오기와 인간 그리고 자연', '5. 따오기를 우포늪에 되살리려면', '6. 되살아난 따오기가 안겨 줄 선물' 등 6차례에 걸친 보도였다. 창녕군, 마창진환경운동연합과 공동으로 중국 따오기 서식지인 샨시성 양시엔현 현장을 둘러보고 따오기 복원 필요성과 실현가능성을 짚어본 공들인 기사였다. 오는 22일 환경부와 창녕군은 우포늪에서 따오기 방사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당시 기획보도로 시작한 '작은 날갯짓'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실현케 한 계기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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