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로세우기 '보도 주력

2003~2004년은 마산지역의 역사를 바로세우는 한 해이기도 했다. '노산문학관'과 '조두남음악관'이 극심한 마찰 끝에 '마산문학관' '마산음악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 을사늑약에 반발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써서 항일 언론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장지연의 친일 행각이 본보 보도로 밝혀지기도 했다.

2003년 2월 26일 12면에 <결국 '노산문학관'으로 되나?> 기사가 실렸다. 2002년부터 문학관 명칭을 두고 갈등이 있었지만 잠정적으로 '마산문학관'으로 명명하기로 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2002년 9월 1일 열린 '문학관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노산문학관'으로 결정됐다는 사실이 이때 알려진 것. 시민 사회는 벌떼처럼 들고일어났고, 이은상의 문학적 업적을 중시하는 측에서는 이은상이 누명을 쓰고 있다며 '노산문학관'이 돼야 한다고 맞받아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논란 끝에 황철곤 마산시장이 7월 9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산문학관' 명칭은 재검토하겠다고 하면서 일단락 됐다.

하지만 이날 황 시장은 함께 논란이 된 '조두남음악관'에 대해서는 친일 의혹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재개관했다고 밝히면서 또다른 논란을 낳았다. 당시 황 시장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해봤더니 친일 의혹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실제 두 곳에서 이 같은 답변을 해준 적이 없다고 부인했기 때문이다.

2003년 5월 29일 1면 <'조두남기념관' 충돌 불가피> 게재. 마산시가 시민단체의 '친일 검증'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29일 개관을 강행 예정이고 시민단체는 물리적 저지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는 기사.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 황철곤 시장이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봉변 속에서 개관식은 강행됐다. 하지만 잇따르는 시민사회의 반발에 마산시는 음악관을 휴관하고 민간단체와 함께 공동조사단을 연변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공동조사단은 7월 중국 연변으로 가서 원로 음악가 김종화 씨를 만나 조두남과 윤해영의 친일행적에 대한 증언을 확보했다. 그러자 조두남 유족 측에서 반발하며 관련 전시물을 철거하겠다고 나서는 등 곡절을 겪었고, 결국 명칭을 '마산음악관'으로 바꿔 재개관하기에 이른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본사 기자회가 매년 신문의 날(4월 7일)이면 언론인으로서 정도를 걷겠다는 다짐을 해왔던 위암 장지연의 친일 행각이 본보 보도로 밝혀진 것이다. 2003년 3월 6일 3면에는 <위암 장지연 합방 이전부터 친일> 기사가 실렸다. 본보가 주말판으로 발행하던 <위클리 경남>을 통해 장지연이 러일 전쟁 당시 황성신문을 통해 '대동아 공영'을 표방했다는 내용이다. 장지연은 이에 앞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통해 꾸준히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게재해 친일 논란이 일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비판하는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을 씀으로써 민족 언론인으로 알려진 그의 잘못이 확연히 드러나게 됐다. 이로써 신문의 날 묘소 참배를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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