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이 된 듯한 기분 들 때 많지만
연 3만 명과 삶에 대한 대화 '뿌듯'
5분마다 울리는 알람을 3차례쯤 끄고 나서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린다. 아직도 옆에서 곤히 자는 어린 아들을 억지로 깨워야 하는데 마음이 안쓰럽다. 또 하루가 시작이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오늘따라 유난히 칭얼거린다. 겨우 옷 입히고 돌아서면 신겨놓았던 양말을 벗어 던져놓고, "엄마, 우리 오늘은 뭐하고 놀 거야?"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향해 물어본다. "응, 엄마는 회사 갈 거고, 원이는 어린이집 가야지." "싫어 안갈 거야! 치∼."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를 겨우 어르고 달래어 집 앞 어린이집에 보낸 후, 마음을 다잡고 출근한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부터 상담 전화벨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왜 내 보험료가 이렇게 많이 오른 거예요? 안 그래도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건강보험료까지 올리면 어쩌란 거예요?" 내가 보험료를 올린 것도 아니고, 그 보험료가 내 통장에 바로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나는 궁지에 몰린 죄인이 된 느낌이다. "네, 고객님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제가 도와 드릴 방법이 있는지 확인해보겠습니다." 부과내용을 한참 설명해드리고, 보험료 조정이 조금이라도 가능한 부분이 있는지 찬찬히 살펴본다. 한 콜이라도 더 받아야 실적이 오르는데 콜은 자꾸 길어지고 마음은 조급해진다. 한 가지라도 더 도와드리고 싶어 문의하지도 않은 부분에 대해 얘길 꺼냈다가 당황한 적도 있고, 급한 마음에 말이 빨라지면 고객이 채근한다. "천천히 좀 얘기하세요. 못 알아듣겠잖아요!" "네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래도 좀 아는 업무가 나오면 다행히 즉시 안내가 가능하지만, 모르는 업무는 매뉴얼을 찾아가면서 안내를 해드려야 한다. "의료급여환자 진료승인번호를 따려고 하는데 산정 특례질환과 관련 없다며 에러코드가 EWS로 시작하는 부분이 발생했어요. 어떡하죠?" 무슨 말인지 당최, 이 사람들이 한국어로 얘기는 하고 있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결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IT상담사? 지사담당자? 어디로 연결해줘야 하지? 검색어를 뭐라고 써야 할까?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이리저리 시간에 쫓기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또 훌쩍 지나가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버렸다.
그동안 내가 받은 콜이 하루 평균 100콜 가까이 되었으니 1년이면 3만 명 정도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기분이 묘하다. 세상에 어떤 직업이 연간 3만 명의 사람들과 생활, 건강에 관한 삶의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상담사라는 직업은, 특히 건강보험 업무상담은 막중한 책임감이 들고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가끔 고함지르는 고객을 만나면 내가 고객에게 욕먹으려고 우는 아이 떼놓고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신입시절 한 고객은 ARS(자동응답시스템)로 제증명 발급을 신청해놓고 통화 연결되니 발급 다 된 것 아녔느냐며 말귀 못 알아먹느냐고 나더러 돌대가리라고 욕하는 바람에 눈물 펑펑 흘린 적이 있다. 그런 경험이 맷집과 거름이 되어 민원성 고객을 응대하는 태도에 많은 유연함도 생긴 것 같다. 비교적 간단한 상담인 건강보험 급여정지해제(입국자) 신청 하나 도와드리는데 "너무너무 친절하네요" 연거푸 고맙다고 인사하시는 할머니와 통화하면서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훗날 ARS가 우리를 대체하게 되어도 친절한 마음만큼은 절대 대체할 수 없을 거라 믿으며 뿌듯하게 퇴근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