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 밑바탕에 항일정신

아무리 인기없는 스포츠 경기도 한국과 일본이 맞붙으면 눈과 귀가 쏠리기 마련. 특히 야구나 축구처럼 열기가 뜨거운 종목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시청률은 '고공행진'을 이어간다. '일제 강점기 36년'을 겪은 데다, 지금까지 일본의 제대로 된 사과조차 없으니, 말 그대로 전쟁을 뜻하는 '한일전(韓日戰)'이 될 수밖에 없다. 양국 선수와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보는 이들 모두 흥분 속에 응원에 나선다.

1920년대 마산에서도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이 심심찮게 야구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여럿 있다.

1921년 8월 29일 자 <동아일보>는 같은 해 8월 25일 오후 창신학교 운동장에서 '마산 일본인 유학생으로 조직된 야구군과 마산조선인 청구군이 시합을 벌여 일본군이 참패했다'고 전한다. 또 1922년 6월 11일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도 '마산일본인거류민으로 조직된 신마산야구선수와 마산구락부군이 야구경기를 벌여 신마산군이 참패'했다. 이듬해인 1923년 6월 15일 오후 3시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신마산 일본인으로 조직된 글로리팀과 구마산 '조선인 올팀'의 경기에서도 13-4로 구마산이 크게 승리했다.

▲ 1927년 6월 12일 구성야구단이 일본인들이 만든 '일인실업청년회야구부실업단'과 경기를 치러 17-16으로 승리했다는 <동아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구성야구단도 1927년 6월 12일 오후 2시 일인실업청년회야구부 실업단을 상대로 17-16으로 승리했다.

당시 신문보도에 '응원대' '박수' '성황'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걸 보면 그때도 스포츠 경기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1운동에 마산의신여학교와 창신학교 등이 앞장서고, 같은 해 4월 마산 지역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 세 개 면이 연합해 벌인 만세 운동(삼진의거)이 있었던 만큼, 당시 일본인과 야구 경기에 나서는 조선인과 응원하는 이들의 마음 한편엔 이러한 '항일정신'이 있었던 것으로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박영주(59) 지역사 연구가 얘기다.

"창신학교가 1914년 민족주의 바탕 속에서 야구를 처음 시작했잖아요. 그 학생들이 주축이 돼 이후 구성야구단을 만들었고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보면 마산 야구는 특히 '항일'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죠. 조선 사람들이 팀 경기에서 힘을 합쳐 일본을 이기겠다, 그런 의미가 짙게 깔려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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