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패 떠나 순수 실력 뽐내며 지역민 사랑·지원 한몸에 받아


마산야구 새 도약

1921년 마산구락부 운동장 조성과 맞물려 이 무렵 마산야구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1922년 제3회 전조선야구대회가 끝나고 나서 박석윤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관전기(10월 21일~11월 3일·총 11회)'가 이를 증명한다. 박석윤은 1922년 12월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팀이 조선 땅을 방문해 전조선 선발팀과 경기를 했을 때 조선 대표 투수로 완투를 했던 인물이기도 한데, 그는 마산야구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번 대회에 남조선 패자 마산이 참가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이다. 풍문으로 듣건대 일본팀과 시합에서 투수는 어깨를, 야수는 다리를 다쳐 참가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산청년들은 얼마나 슬플까. 마산팀은 타격에서 우수한 기술을 지닌 팀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야구계는 타격이 몹시 부진한 상태다. 내년에 마산군이 타격감을 충분히 발휘하길 바란다.'

'남조선 패자(覇者·운동 경기나 어느 분야에서 으뜸이 되는 사람 또는 단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이 시기 마산야구는 전국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었다. 선수·장비 수급이나, 대회 참여에 필요한 경비 마련에 일부 문제를 겪었을지언정 실력만큼은 존경받아 마땅했던 셈이다.

이런 마산야구가 또 한 번 발전을 이룩한 건 1920년대 중반이다. 창신학교를 졸업한 김성두를 주축으로 지금의 야구동호회 격인 야구단이 조직됐는데 그 이름은 '구성야구단'이다.

물론 구성야구단 이전에도 마산에는 일본인들로 구성된 '글로리단'과 한국인들로 구성된 '미우팀' 등이 있었다. 1920년대 들어서는 보청팀, 마산중포병대대 야구단 등도 활동했다. 1928년 마산체육협회 재발족 이후에는 야구 활성화에 탄력을 얻었다. 다이조 타이마이가 기증한 우승기 쟁탈전 등 야구대회가 열리는 등 그야말로 '마산 야구 붐'이 일었다. 그럼에도 구성야구단이 오래도록 회자하는 이유는 지역 청년 중심으로 마산야구 1세대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순수 동호회라는 점, 남다른 실력을 자랑했다는 점, 지역 유지들 관심이 높았다는 점 등 때문이다.

구성야구단 출범 연도·전신은 명확하지 않다. 단, '구성야구단'이라는 온전한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건 1926년으로, 이 때문에 구성야구단 창단을 이때로 보는 눈이 많다. 1926년 10월 10일 '구성야구단 부흥'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다.

'침체에 빠진 마산운동계를 안타깝게 생각한 지역 청년 10여 명이 힘을 모았다. 이들은 수년 전에 만들어져 명성 높았지만 여러 문제로 흐지부지 존재하던 '마산구리야구단'을 부흥하기로 했다. 이들은 야구단을 새롭게 편성하는 동시에 마산야구계 장래를 고려해, 소년선수를 키우기로 했다.'

이때 김성두와 함께 마산운동계 부흥과 구성야구단 창단에 앞장선 건 이광래·김육·김광수·김주찬·윤종진·김용원·최문식 등이다. 대부분이 창신학교 야구창단 멤버들로, 자신들 주무대를 학생부에서 성인팀으로 옮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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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별

구성야구단은 이따금 서울·부산 등 대도시 야구단을 초청해 경기를 벌이곤 했다. 하지만 야구단 운영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야구단 운영비를 마련하는 일이 특히 문제였는데, 지역 유지들이 해결에 힘을 모았다.

1927년 3월 18일 '구성야구단부흥'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다.

'마산야구계 패왕 구성야구단은 경제적 문제 등 여러 가지 장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마산운동계 유지 김계호와 김종수를 비롯한 청년 수십 명이 도움을 줬다. 지원을 받은 구성야구단은 최근 구단 내부를 다지고 운동기구를 사들이는 등 맹렬히 연습하고 있다.'

주변 도움뿐 아니라 구성야구단 자체적으로도 돌파구를 모색했다. 마산에서 개최하는 문화행사 중심 역할을 맡은 건데, 1927년 8월 10일 열린 '음악 및 소녀가극납량연주회'가 대표적이다.

구성야구단이 주최하고 마산악우회, 마산악대, 구성야구단 후원회, 3개 단체가 후원한 연주회 사회는 김성두가 맡았다. 연주회에서는 구성야구단 단가 후 20여 곡의 청아한 음악이 울려퍼졌다. 특히 소년들만으로 구성된 합창단이 '빛난 무궁화'를 불렀을 때 관중 호응이 컸다. 연주회를 통해 구성야구단은 상당한 동정금을 모아, 야구단 운영 경비에 사용할 수 있었다. 연주회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연주회가 대성황을 이루었다', '박수소리로 장내가 진동했다'고 할 정도니 구성야구단 위치와 인기를 가늠하게 한다.

지역민이 보내준 동정에 구성야구단은 '실력'으로 답했다. 1927년 6월 12일 구성야구단은 일본인들이 만든 '일인실업청년회야구부실업단(이하 실업단)'과 경기를 치렀다.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열린 이날 경기에서 구성야구단은 실업단을 17-16으로 꺾으며 마산야구 자존심을 세웠다.

물론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매번 승리만 있었던 건 아니다. 1927년 9월 4일 진해해군공작부야구단과 경기를 치른 마산구성야구단은 진해군에 6-8로 패했다. 마산중앙운동장에서 열린 이날 경기는 3시간가량 진행됐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양군의 형세가 비등했다', '해당 시합은 우천으로 몇 차례 연기됐다가 열렸다', '관중 인기를 끌었다'고 경기 안팎 분위기를 전했다.

매 경기 승패를 떠나 빼어난 실력을 뽐냈던 구성야구단은 1931년 남조선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최전성기를 맞았다. 남조선야구대회는 1931년 10월 18~19일 여수야구장에서 여수이글구락부 주최와 <동아일보> 여수지국 후원으로 열린 대회다. 대회에는 마산구성야구단을 비롯해 순천야구협회, 여수야구협회 이글구락부 등이 참가했는데 우승은 구성야구단에 돌아갔다.

1931년 이후로 구성야구단 활동 소식은 찾을 수 없다. 팀이 자연스럽게 해체됐는지 혹은 팀 명을 바꿨는지 등 어느 하나 명확하지 않다. 단, 구성야구단에서 뛰었던 선수가 다른 팀에서 활동했던 기록은 있다. 1934년 창단한 '쓰바메(제비) 야구단'이 한 예다. 한국인으로만 구성한 이 팀에는 김성두(투수 겸 외야수·마산부청), 김육(외야수), 김광수(포수 겸 3루수·마산우체국) 등 구성야구단 주축 멤버가 속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백두광(포수·마산우체국), 박상화(유격수·기관고), 박순경(투수·개인사업) 등이 더해진 쓰바메 야구단은 일본인 야구단과 친선경기를 벌이며 당대 마산 야구단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밖에 1935년 <동아일보> 마산지국 주최 연식야구전 준비위원에 김성두가 이름을 올리고, 김광수가 훗날 부산야구협회 심판위원장을 지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구성야구단 영향력과 소속 선수들의 활동은 지역에서 꽤 오랜 기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구성야구단 창단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옛 신문기사를 근거로 1926년을 창단시기로 보는 시각이 많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게 1924년 <조선일보> 기사다.

1924년 4월 17일 <조선일보> 4면에는 제목 '마산야구단재흥', 부제 '주성야구단개명'을 단 기사가 실렸다. 현대식으로 바꾼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여 년 이래로 남조선야구계 패권을 장악하고 전 조선에 명성이 자자했던 마산야구단. 하지만 지난가을 이래로 선수 부족과 기타 원인으로 활동이 지지부진했다. 이에 단원과 유지 몇 사람의 발기로 지난 13일 마산구락부회관에서 야구단재흥을 위한 회의가 있었다. 회의에서는 마산야구단 명칭을 적성야구단으로 바꾸고 규칙과 유지방침을 논의했다. 또 감독 손문기, 간사 강종완, 고문 김지철 등 10명을 임원으로 뽑고 11시 반에 폐회했다.'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 부제의 주성야구단은 본문에서는 적성야구단으로 등장한다. 어느 것 하나가 오타이거나 구성야구단을 잘못 쓴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울러 감독·간사·고문 등으로 뽑힌 이름은 1926년 구성야구단 멤버와 한 명도 겹치지 않는다. 혹 적성(혹은 주성)야구단이 구성야구단 시초가 맞다면 창립 멤버와 야구 부흥을 재차 이끈 멤버가 다르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시기 마산야구단은 '침체-부흥'을 수차례 겪었다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야구 명맥을 이으려는 노력이 수년간 지속해 왔다는 건 새겨둘 만하다.


※ 참고 문헌

-<마산시사>, 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DB조선
-디지털창원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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