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이루는 것은 나무와 풀꽃…소탈한 시 계속 쓸 것"

창간 20주년이 됐으니 이제부터 뭔가 색다른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동시에 처음에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20년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움보다는 어쩌면 꾸준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꾸준함의 밑바탕에는 우쭐하지 않는 겸손이 있지 아닐까 싶습니다. 창간 20주년 특집으로 마련한 문화예술인 인터뷰는 이렇게 잘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만의 꾸준함으로 일생을 살아오신 분들을 담아볼 계획입니다. 이분들의 삶에 우리가 참고할 어떤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 홍진기 시인이 지난 1일 창원시 의창구 소계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민지 기자 kmj@idomin.com

◇'꼰대'를 거부한 원로시인

가장 먼저 홍진기(83·창원시) 원로시인을 찾아뵈었습니다. 이분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시 창작 이론의 명강사로 말이죠. 2000년대 초반 경남문학관이 개관할 때 '경남문예대학'이 열렸습니다. 젊은 문학 지망생들이 많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시 창작론을 가르치던 홍 시인에게서 인상적인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분을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문단 행사에 잘 안 나오시니까요. 몸이 불편해서라기보다는 워낙에 형식적인 자리를 싫어하시거든요.

그러다 우연히 홍 시인이 창원문화원에서 문예창작 강의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몇 번인가 찾아가서 수업을 들었지요. 나름 어려울 수도 있는 문학 이론을 소탈한 일상 경험에 빗대어 이해가 잘 되도록 설명하시더군요. 그만큼 이론을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죠.

그렇게 얼굴을 익혀 둔 상황이라 인터뷰 섭외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홍 시인은 '나한테는 배울 기 하나도 없다'며 손사래를 치긴 했습니다. 그렇게 훈계조라고는 전혀 없는 소탈한 말투로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터뷰 내내 뭔가 '꼰대'가 되기를 거부한, 아니 '꼰대'가 될 수 없는 원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홍진기 시인이 창원문화원에서 문예창작 이론 강의를 하고 있다. /이서후 기자

◇소탈한 문학 금수저

홍 시인은 재능으로 보나 인맥으로 보나 '문학 금수저'라고 할 만합니다.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오셨는데, 미당 서정주 시인이 은사였죠. 서정주 시인이 당대 문화계 최고 권위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실력만 된다면 서정주 시인의 권위를 빌려 등단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테지요. 당시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는 우리나라 문학 교육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문예지든, 협회든 문단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었죠.

대학 시절 서정주 시인이 홍 시인에게 시를 쓰라고 권유했답니다. 하지만, 무슨 객기였는지 이를 마다했다지요. 그러고는 대학을 졸업하고 경남으로 돌아와 국어교사 생활을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숨길 수는 없었나 봅니다. 서정주 시인에게 글을 쓰겠다는 일종의 다짐을 하기도 했고요. 자신을 가두고 시를 전념해 쓰려고 통영 한산도로 발령을 받아 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40대 초반이 되어서야 문단으로 나섭니다. 한때 우리나라 최정상 등단 코스였던 <현대문학> 자유시로 3회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했고요, <시조문학>에 시조로, <문예사조>에 소설로도 당선이 됩니다. 그냥 글재주를 타고난 셈이죠.

"당시는 그래도 내가 잘나간다, 그런 생각은 못해봤어요. 지금도 내 작품을 보면 부끄러워, 솔직히."

하지만, 재능을 보나 스펙으로 보나 홍 시인이 경남은 물론 전국적인 문화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환경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애초에 권력이나 명예와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최종 목표가 교장이 되겠다, 교육장이 되겠다, 이런 게 아니라 '최고의 국어교사가 되겠다'였으니까요.

"솔직히 명예욕, 권력욕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라. 다 있는데, 삶에서 그 비중이 어느 정도 크냐 그 차이라고 봅니다. 나는 자기 능력을 능가해서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그러면 그 명예와 권력에 자기가 묻혀서 질식하게 돼 있어요. 제가 명예욕, 권력욕 다 부렸으면 아마 진즉 질식하고 말았겠죠."

▲ 문화부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홍진기 시인. /이서후 기자

◇산이 산이 되는 이유

그러던 홍 시인에게도 좌절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은사인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란 시를 제대로 해석해 보고 난 뒤의 일이었지요.

"그때 국어 교과서에 '국화 옆에서'라는 미당 선생의 시가 있었어요. 국어 자습서는 아주 피상적으로 해석을 해 놨더라고. 이게 아닌데 싶어 어느 날 제대로 해석을 해 봤지.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시 쓰기 싫은 거라. 선생의 시를 보고 내 시를 보니까, 아이고 유치해서 못 보겠는 거예요. 아이고 안 되겠다, 포기하자 하고 1년 동안 시를 한 편도 안 썼어요."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지 얼마 안 된 때라 여러 곳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심지어 국회에서 발행하는 회지에 시가 실렸던, 잘 나가던 시인의 침묵이 시작된 거죠. 그리고 어느 날 그가 좋아하는 창원 천주산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은 게 있어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답니다.

"그때가 봄이었을 거예요. 연두색 새순이 나오고 그런 게 그렇게 아름답더라고. 그걸 보고 아, 저 산을 산이게 하는 것은 우람하고 훌륭한 나무 한 그루가 아니다, 부러진 나뭇가지, 이름 모를 풀꽃들이 다 어우러져서 산이 되는 거다. 이들이 봄을 만들고, 여름을 만들고, 가을, 겨울을 만드는 거다. 국화 옆에서 같은 시는 못쓰지만 내 시가 산을 이루는 풀꽃이라도 될 수는 있겠다, 하고 생각하고 나니 글을 쓸 수 있겠더라고요." 홍 시인은 아직도 가슴에 교훈으로 품고 다니는 서정주 시인의 말이 있습니다.

"졸작이라도 자꾸 쓰면 명작이 나와. 그런데 명작 한 편 쓰겠다 욕심 부리면 졸작도 못 쓰고 죽어. 그냥 시 쓰게."

하여 그에게 문학이란 등단하고 나면 다 이룬 게 아니라 평생을 해도 끝이 없는 공부입니다. 여든을 넘긴 홍 시인이 아직도 '정말 내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쓰려고 새벽을 밝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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