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 이하응, 큰 뜻 품은 채 드러내지 않고 화폭에
스승 추사 김정희 '서화 필묵법'기초 독창성 담아

어린 시절 가장 멋지게 들렸던 말 중에 '풍운아(風雲兒)'라는 말이 있다.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험난한 역경을 이겨내고 두각을 나타낸 사람을 보통 풍운아라 하였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으로 늘 입에 오르내리던 인물이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TV 연속극에도 자주 나왔다.

흥선대원군이 활동한 개화기를 소재로 한 연속극은 매우 인기가 있었고, 시청자들은 극 속의 연기자가 마치 실제 인물인 것처럼 마음속에 새기곤 하였다. 지금도 흥선대원군의 모습을 떠올리면 실제 모습과 상관없이 당시 배역을 맡았던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흥선대원군 이야기는 늘 흥미진진하였는데, 내용은 대부분 김동인(金東仁)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설의 제목처럼 운현궁을 중심으로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고종의 아명)이 임금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흥선대원군이 노력하는 내용을 담았다. 결국 당대 최고의 세력가 조대비(趙大妃)와 연줄을 맺은 흥선대원군은 철종의 왕위 계승자로 자신의 아들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그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흥선대원군이 어려운 시절을 살아남기 위하여 상갓집 개처럼 행세하면서까지 안동 김씨 일파로부터 모든 수모를 참아내는 장면이었다. 그는 종친의 위세를 회복하기 위해 '파락호(破落戶)'와 같은 삶을 산다. 파락호란 행세하는 집의 자손으로서 타락한 사람을 말하는데, 이 어려운 단어가 어린 나이에 유독 귀에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흥선대원군은 대갓집, 기생집, 잔칫집을 기웃거리며 비굴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사기도 한다.

그런 중에 집에 돌아와 시간이 나면 와신상담하듯 난초 그림을 그린다. 극 중에서는 난초를 그리는 행위가 가슴 속에 큰 뜻을 숨기는 것으로 복선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가 대원군이란 인물이 난초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된 순간이었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거점이다. 조선 말기 이 땅에 들어온 외국 세력에게는 조선 정치의 상징적 공간으로 인식되어 많은 사건의 중심에 놓였던 곳이다. 현재는 노안당과 노락당, 이로당이 남아 당시의 위세를 보여준다. 운현궁 건물 중 대원군이 거처했던 곳은 '노안당'이다.

노안당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편액 끝에 김정희가 이하응을 위해 써주었다고 되어 있으나, 노안당의 완공 시점이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후의 일이라 '집자(集字)'해서 만든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이하응은 서화가로 활동할 때에는 '석파(石坡)'라는 호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의 글씨는 스승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글씨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큰 글씨는 김정희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의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 지난 2017년 뉴욕소더비 경매장에서 열린 한국미술품 경매에서 13만 4500달러(한화 1억 6000여만 원)로 판매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그린 열폭짜리 묵란도(墨蘭圖) 병풍. /연합뉴스

그러나 김정희의 글씨와는 다른 자신만의 개성이 듬뿍 나타난다. 자신의 인생 역정이 드러나듯 구성면에서 일탈이 많고, 글자 필획의 줄기에 기름기가 적고 획이 마르고 굴곡이 많다. 부드러운 면보다는 억세고 강인한 면이 많다.

또한 이하응은 '묵란(墨蘭)'을 잘 친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난 또한 스승 김정희의 서화 필묵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고도의 필력과 문기(文氣)가 함축되어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흔히 '석파란(石坡蘭)'이라 고유명사처럼 불리는 것은 그만큼 개성 있는 세계를 보인다는 뜻이다.

스승 김정희는 이하응의 난초에 대해 "허리를 구부려 난초 그림을 보니 이 늙은이라도 역시 마땅히 손을 들어야 하겠다, 압록강 동쪽에서는 이보다 나은 작품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면전에서 아첨하는 한마디 꾸밈말이 아니다"라 칭찬할 정도로 빼어난 솜씨를 보였다.

필자는 근래에 '석파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을 볼 수 있었다. 1890년 71세 때에 그린 것으로 임오군란 후 청나라 유폐에서 돌아와 권토중래하던 시기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하응의 난초는 잎이 날카로우면서도 짧고, 꽃도 몇 송이로 간략하게 친다. 또한 잎을 그리는 선묘에 붓을 꺾는 굴곡이 잦아, 변화가 많으나 때로는 유연하지 못하고 억세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그에 비해 이 작품은 비교적 잎이 길고 유연해 좀 더 넉넉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천에 그렸음에도 먹의 농담이 자연스러워 회화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미덕이 있다.

한 화면의 양쪽으로 괴석에 난초를 포치하는 방식은 마치 대련 두 폭을 한 화면에 서로 마주하게 한 듯한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흔히 보이지 않는 표현 방식이다. 구성도 특별하고 필법도 뛰어나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더욱이 지금껏 소개되었던 이하응의 난초 작품 중에서 크기도 가장 크고, 제작 연도와 제작 연유가 명확해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림과 글씨의 조화도 뛰어나 '석파란'의 전형을 보여주는 기준 작품으로 삼을 만하다.

이하응의 난초 그림은 또한 가짜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그림 절반 이상이 가짜라는 말이 나돌 정도이다. 이렇게 '석파란'에 대해 의심이 많은 것은 그의 지난한 삶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의 난초 그림이 이름을 떨치자 찾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이하응이 주문에 모두 응할 시간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난초 잘 치는 서화가들이 대신해 그려 주는 경우가 많았다. 윤영기, 나수연, 김응원, 박호병 등 당대 수준급 서화가들이 대필을 자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서화가들이 대필한 작품들이 문제가 되었다. 그림은 다른 이들이 그렸으나 글씨와 낙관은 이하응이 직접 한 경우가 많아 대필을 가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들이 훗날 위작 시비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 가품이 많다는 말이 많아진 것이다. 여기에 실제 위작까지 더해져 '석파란'에 위작이 많다는 말이 정설처럼 떠돈 것이다. 이러한 위작 시비 또한 이하응의 난초 그림이 그만치 매력이 있고 유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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