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사회 속 은둔 시인이 써 내려간 비애
여성시인 에밀리 디킨슨 일대기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란 무엇인가. 한 젊은 시인은 무용하기에 억압받지 않는다고 했고, 한 노시인은 이야기가 아니라 낯선 이미지화라고 했다.

19세기 미국에서 살았던 에밀리 디킨슨(1830~ 1886)은 어떨까? 일생을 거쳐 거의 하루에 한 편씩 시를 썼지만 알려진 시는 일부에 불과한, 은둔 작가라 불렸던 디킨슨.

"시는 우릴 둘러싼 내세에 대한 위로예요."

글로써 위안과 위로를 받았던 한 시인의 삶을 영화로 들여다봤다.

▲ 19세기 미국 청교도 집안에서 자란 에밀리 디킨슨은 바깥 활동을 하지 않으며 생과 사,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무한한 영감을 받아 시를 써간다. /스틸컷

◇고독하고 치열한 투쟁

<조용한 열정>은 에밀리 디킨슨의 전기를 다룬 영화다. 이야기는 디킨슨(배우 신시아 닉슨)이 신에 대한 종교적 억압이 강했던 신학교를 나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무릎 꿇어 기도하지 않는 디킨슨. 그는 억지로 믿을 수 없다고, 자신의 영혼은 제 것이라고 말하며 신에 대한 선택을 존중받길 원한다.

미국의 한 독실한 청교도 집안에서 나고 자란 디킨슨은 누구보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표현하며 살아간다. 이는 가족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자신을 숨기지 않고 옳다고 여기는 신념대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모두 응원한다. 누구보다 여동생 비니(배우 제니퍼 엘)와의 우정은 아름답다.

디킨슨이 매일 하는 일은 시 쓰기다. 가족이 모두 잠든 새벽에 홀로 앉아 펜을 든다.

남성중심사회, 남북전쟁으로 많은 이가 희생되고 노예제도 폐지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던 시대에 그는 시를 쓴다.

무도회에서 괜찮은 남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뜨개질을 하며 사는 여성의 존재를 고민하고 폭력적이다 싶을 정도로 억압적인 기독교에 대해 말을 한다.

집과 가족만이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는 유일한 장소라고 여긴 디킨슨은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바깥 활동을 하지 않는 디킨슨에게 생과 죽음, 고독과 어둠, 자연의 아름다움 등은 무한한 영감이다.

디킨슨이 영화 중간마다 시를 읊는 장면은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런 그에게 생각의 깊이가 저절로 보인다고 말하는 친구 버펌(배우 캐서린 베일리)은 든든한 존재다. 둘의 대화는 유머러스하지만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깔렸다.

하지만 버펌은 결혼을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동요했던 유부남 목사도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디킨슨은 모두 자신을 떠난다며 절규한다.

"너에겐 시가 있잖아"라고 말하는 오빠의 아내 수잔(배우 조디 메이)을 향해 "너에겐 삶이 있잖아. 난 그저 일상이고. 구제 불능에게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디킨슨은 자신의 못남을 자책하며 고통과 균열을 시에 새긴다.

디킨슨은 그가 정한 고결함과 성인의 기준이 자신에게 무자비하게 돌아오지만, 자신이 겁내는 대로 변해버린 모습을 깨달으며 또 한 번 시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에서 디킨슨은 신장병으로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 장면은 그저 슬프다기보다, 위안을 받는 듯하다. 그가 죽음의 여정을 상상하며 쓴 시와 한 시인의 삶에서 존재와 실존의 용기를 얻는다.

<조용한 열정>을 연출한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은 알려진 게 많이 없었던 은둔 시인을 스크린으로 옮기며 시를 영상으로 쌓았다.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감정의 조각들로 그리며 관객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했다.

영화는 인터넷 사이트 등 여러 경로로 볼 수 있다.

◇묘비명, "불려 갔음(called back)"

에밀리 디킨슨은 '과격한 개인주의자'라는 평을 받았다. 지금은 19세기 미국의 대표 시인으로 손꼽히지만 1955년, 시인의 사후 69년이 되는 해가 되어서야 디킨슨의 온전하고 완전한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그의 시는 완전히 가려진 채 시인의 고독에서 은밀히 창조됐었다. 원고만 170여 편에 이른단다. 이때부터 디킨슨은 위대한 미국의 시인으로 재조명을 받는다. 인간과 삶, 시간, 우주를 노래하며 깊은 비애를 말했다. 자연에 대한 통찰도 깊었다.

특히 죽음이란 주제는 특이한 양상을 띤다. 보편적인 서구의 죽음이 아니라 한 따뜻한 구원자로서 꽃마차의 이미지를 빌려 다가오며 끊임없는 원망의 대상도 된다.

"내 죽음 때문에 멈출 수 없기에/친절하게도 죽음이 날 위해 멈추었네/수레는 실었네, 우리 자신은 물론/또 영원을."

'내 죽음 때문에 멈출 수 없기에'라는 제목을 단 이 시는 디킨슨의 시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쓰인 것으로 평가된다. 죽음의 모습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이처럼 시는 100년 세월도 훌쩍 뛰어넘는다.  

※참고 문헌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에밀리 디킨슨, 강은교 옮김, 민음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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