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공무원 밤엔 작곡가 독학으로 깨친 음악 세계
20대 초 경남도청 근무하며 이화여전 임동혁 교수 사사
해방 후 '까치의 죽음'작곡, 독창적 창작활동 밑거름

1960~1970년대 우리나라 영화음악을 주름잡았던 작곡가 정윤주(1918~1997)를 아시나요? <갯마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등이 그가 참여한 작품입니다. 그는 통영 출신으로 윤이상과 비슷한 시기에 통영공립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윤이상이 한 살 많은 형이었죠. 8일은 22년 전 정윤주가 눈을 감은 기일이며 오는 14일 실내악 전문 연주단체인 경남쳄버쏘사이어티가 정기연주회에서 그의 곡을 선보입니다. 동시대 작곡가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한 그에 대해 두 차례 걸쳐 알아봅니다.

▲ 통영 출신 작곡가 정윤주의 1990년대 모습. /유족

◇비전공자·독학으로 일궈낸 음악 = 정윤주는 학교에서 작곡을 배운 적이 없다. 유학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독학으로 음악을 체득했다. 아들 정대은(69) 씨는 아버지에 대해 '음악에 무한한 열정과 사랑을 갖고 오로지 창작에만 전념하신 작곡가'로 기억했다.

정 씨는 "아버지가 경남도청에 취직했을 당시 할아버지가 양복과 구두를 사라고 준 100원으로 전부 음악책을 샀고 이를 본 할아버지가 굉장히 화를 냈다고 들었다"고 했다.

배움을 갈망하던 그는 월간잡지에 기재된 이화여전 임동혁(1912~?) 교수 프로필을 보고 직접 찾아간다. 당시 정윤주는 경남도청 토목과에서 한강수력발전회사 설계과로 전직한 상황. 그는 일하면서 일주일에 한번 수업을 받았고 한 달에 한번 임 교수와 새로 나온 레코드를 감상하며 현대음악을 접했다. 이 같은 생활은 4년간 계속됐다. 그의 나이 21~25살 때였다. 해방을 맞이한 1945년, 27살부터 그는 통영중학교 음악교사로 7년간 일한다. 낮에는 일에, 밤에는 작곡에 매진했다. 그는 "토목을 하자고 누가 나를 유혹할지라도 그 길은 영영 가지 않을 것이며 이제부터는 오직 작곡에만 나의 모든 정열을 쏟겠다"고 결심했다. 이때 그의 첫 작품 '현악4중주곡 제1번'(1950년)과 '까치의 죽음' 전주곡(1952년)이 탄생한다. 특히 '까치의 죽음'은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곡이다. 부산극장에서 초연됐을 당시 연주를 들은 미국인의 추천으로 미국공보원(USIS) 상남영화제작소 음악담당(1953~1957년)으로 일했고 한국음악가협회 제1회 작곡상을 선사했다.

◇예술음악과 실용음악 넘나들어 = 정윤주가 활동할 당시 우리나라 작곡가는 가곡(성악곡)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펼쳤다. 반면 정윤주는 관현악곡에 집중했다.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기악음악곡이 많고 성악곡은 상대적으로 적다.

김형주 음악평론가는 "정윤주는 가곡이나 실내악에 비하면 관현악 작품이 많고 작품성이 뛰어나 관현악 작곡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며 "이 점이 다른 작곡가들과 차별화된 정윤주만의 존재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정윤주는 영화음악의 개척자다. 그가 남긴 영화음악 작품 수만 해도 약 300편.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제1·2·4·21회 대종상 음악상, 5·6·10회 청룡영화제 음악상을 받았고 그 외 많은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휩쓸었다.

정윤주가 영화음악 작곡가로 활동한 계기는 1958년 문화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음악담당직 제안을 받으면서다. 이때부터 영화음악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내심 예술음악과 영화음악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 문공부를 떠나면서 "본의 아니게 영화음악 작곡가로 전락된 것처럼 됐다.(중략) 일류문인이 되기 전에 잡다한 잡문을 많이 쓰다시피 나로서도 비록 잡문과 같을지라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어 생계도 무난히 꾸려 나갈 수 있으리라는 마음에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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