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진해 이애숙 가옥
새로운 건물 짓기 위해 헐려
시민 "환산 못할 가치 사라져"
시 철거 사실조차 인지 못 해

창원 근대문화유산이 또 하나 사라졌다. 지어진 지 100년 가까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해구 '이애숙 가옥'이 8일 철거됐다. 이를 안타까워하는 목소리와 함께 창원시 근대문화유산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경남도 근대건축문화유산 자료를 보면 이애숙 가옥(창원시 진해구 속천로 44, 옛 방순자 가옥)은 일제강점기 1938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상 2층(174.73㎡) 규모로 상가 건축물과 유사하며 주상복합 형태다. 1층은 상가로 사용하고, 2층은 주택이나 창고로 사용했다. 특히 2층 방바닥은 짚으로 만든 판에 왕골 등으로 만든 돗자리를 붙인 일본 '다다미'다.

▲ 8일 근대문화유산인 창원시 진해구 속천동 '이애숙 가옥'이 철거되고 있다. /김희곤 기자

근대건축문화유산 보고서에는 "이애숙 가옥은 원형 그대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일제강점기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로 활용가치가 높다. 30여 년 전 한 일본인이 자신의 집이었다며 찾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애숙 가옥은 8일 오전부터 뜯겼다. 진해구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이곳에 5층 건물 건축허가가 났다. 허문 자리에 음식점과 의원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에 1909년 지어져 100년 넘게 자리 잡고 있다가 철거된 '삼광청주'와 비슷한 사례다. 삼광청주는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2011년 헐렸고, 그 자리에 다가구 주택이 들어섰다. 개발 논리에 역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애숙 가옥 철거 현장 앞에서 만난 주민은 사라지는 역사의 흔적에 대해 씁쓸해했다. 한 주민은 "100년 정도 된 건물로 알고 있다. 기존 형태를 그대로 두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철거 공사 관계자도 마찬가지였다. 공사 관계자는 "카페가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건물은 흔치 않은 공법으로 지어져 잘 보존돼 있었다. 이음매가 견고해 잘 부서지지도 않았다. 리모델링을 해서 외부 형태라도 남겨두고 활용했으면 어땠을까 싶다"며 "건축주가 기와 일부를 보존해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진 등 기록이라도 보존하고자 철거 현장으로 달려온 한 건축사는 창원시의 근대문화유산 인식과 정책을 비판했다. 김석철 GS건축사사무소 건축사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사라졌다"며 "보존을 하면서도 새로운 건물을 증·개축하는 방법도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건물로 재탄생하면 가치는 2~3배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창원시 관련 부서가 근대건조물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나. 사유재산이지만 보존을 위해 얼마나 설득을 했을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 경남도 근대건축문화유산 자료에 등록된 2015년 이애숙 가옥 모습. /도 근대건축 문화유산 DB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도 "개인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창원시에 몇차례 매입 건의를 했으나 방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며 "그동안 소유권이 몇차례 바뀌었고, 곧 새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 안타깝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올해 1월 전남 목포에서 '손혜원 국회의원 투기 논란'으로 근대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확산한 바 있다. 당시 김경수 경남도지사도 간부회의에서 "현재 논란이 되는 일과 별개로 도내에도 근대문화유산 건축물이 적지 않다. 마산·진해·통영·진주 등에서 제대로 된 보존대책이 없어 버려져 있거나 곧 사라질지 모르는 문화유산에 대해 각 시·군과 함께 보존대책을 수립하라"고 했었다.

이애숙 가옥은 2015년 경남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후 C등급을 받았다. A등급이 건축·역사학적으로 '등록문화재급'이다. C등급도 소유주가 요청하면 심의·자문을 거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소유자는 보존·관리를 위해 최대 3000만 원까지 보조금(자부담 70%)을 지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애숙 가옥은 그런 과정이 없었다.

유진상 창원대 건축학과 교수는 "창원시와 경남도에 근대건조물을 현대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홍보하고, 소유자에게 등급이라도 전해달라고 수십 번을 건의했는데 이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직무유기"라고 비판했다.

창원시는 이날 이애숙 가옥이 철거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시 문화예술과 관계자는 "조사된 근대건조물이 창원에 91개소인데, A등급 소유자도 대부분 근대문화유산 지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C등급 근대건조물에 대해서는 관리가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며 "문화재보호법처럼 강력한 규정이 아니다 보니 철거에 대해 규제할 방법이 없어 답답한 면이 있다"고 했다. 이어 "진해구청도 마찬가지로 철거하지 못하도록 규제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창원시 근대건조물 보전 및 활용에 관한 조례'에는 시가 근대건조물을 보호하거나 소유자·관리자가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을 뿐이다. 시 문화예술과는 올해 근대건조물 관리 기본계획을 세워 다른 근대건조물 여부에 대해서도 조사·발굴할 계획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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