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구분하는 잣대 그 뿌리깊은 오만
여성 폭력문제 연구모임 '도란스' 사회 깊숙이 박힌 젠더 관념 분석

2018년 1월 29일 이후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서지현 검사의 검찰 조직 내 성폭력 피해 고발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중심적 성 문화를 뒤흔든 일상의 혁명 '미투 운동'.

저자들은 미투 운동이 전 세대 여성들이 고르게 지지한 운동이지만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 사회 질서 전반에 성차별적 통념이 얼마나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에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폭력 문제를 다루어 온 연구모임 '도란스'를 꾸려나가는 이들은 미투 이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먼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젠더에 기반한 폭력의 대표적임을 강조한다. 젠더에 기반을 둔 폭력은 강간 범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 거대한 성 산업, 재생산권부터 지구화 시대의 국제 정치와 환경 문제까지 아우르는 사회 현상의 가장 근본적인 매트릭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서두부터 미투의 원인, 구조, 의미를 더 이해하려면 당연히 젠더라는 사회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고 이른다.

▲ 지난해 11월 26일 미투경남운동본부가 창원시 성산구 사파동 창원지방법원 앞에서 여성폭력 추방 캠페인과 기자회견을 열고 "서지현 검사 미투 고발 이후 위드유와 같은 반향이 있었지만, 우리 사회가 달라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경남도민일보 DB

권김현영은 안희정 사건 재판을 방청하면서 기술한 참여 연구자다. 그는 1심과 2심 공판을 방청하면서 무엇이 어떻게 언론에서 보도되는지, 어떤 프레임이 만들어지는지, 여론이 언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분석했다.

정희진의 글은 미투 운동을 중심에 두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젠더 개념을 소개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현실 권력과의 거리 여부에 따라 어떤 가해자는 덜 보도되고, 더 보호받는다면 미투는 또다시 남성들 간의 정치 내부에서 그들의 기준으로 선별된다며 피해자가 누구든 가해자가 누구든 죄질에 따라서만 심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채윤은 소설 <춘향전>을 재해석해 성적 자기결정권의 맥락을 이론화하고 역사화했다. "대체 남성에게는 전혀 없는 정조 관념이 왜 여성에게는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루인의 글은 누가 '진정한 여성'이며 폭력의 개념은 누가 정하느냐는 여성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논쟁을 품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스스로 올바르다고 여기는 이들의 오만과 착각을 들춰내는 글이 날카롭다.

권김현영은 안희정이 권력형 성폭력으로 재판을 받아야 할 재판장에서 사건 관련 증언들이 불륜의 정황으로 배치되는 것이 허용됐고, 남성 중심 문화에 적응하면서 자신도 그 문화 일부가 된 386세대 진보 여성들이 분열됐다며 '여성문제'라는 프레임은 단단했다고 말한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대 진보 엘리트들은 자신이 바로 약자거나 피해자가 아니라 전위로서 '민중'을 지도한다는 생각으로 안희정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여성보다는 오히려 안희정을 '지키려고' 나선 부인에게 더 쉽게 동일시됐다"고 지적했다.

▲ 〈 미투의 정치학 〉권김현영·루인·정희진·한채윤 지음

또 정희진은 이렇게 말했다.

"똑똑하거나 자기 언어를 가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여성은 피해를 인정받기 어렵다."

피해 여성이 남편을 피해 다니다가 살해당해야만 가시화되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비판하며,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기는 이들마저 남성 중심적 시각을 보인다고 토로했다.

정희진은 "우리 사회 권력 집단에 속한 피해자가 자기 삶을 걸고 방송에 나와 역시 최고의 담론 권력을 쥔 앵커와 마주 보고 증언할 때라야 피해자의 목소리가 겨우 닿는다"고 적은 한 언론사의 칼럼, '검사 같은 전문직 여성이 아닌 비정규직 여성들이 당하는 현실'을 보여준 만평을 예로 들며 이러한 '자조'는 그럴듯한 논리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젠더 문제라기보다 계급 문제로 접근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의 대변자로 자처하면서, 자신을 '가장 올바른 입장'에 놓았다는 것인데, '다른 목소리'가 아니라 '가장 올바른 목소리'를 취한 오만이다. 또 <춘향전>에서 변학도와 춘향이 대립하는 갈등의 핵심이 '정조'가 아니라 춘향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변학도는 자신의 직위를 지키려 했음을 읽어야 한다는 한채윤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교양인 펴냄, 194쪽, 1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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