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문학·가요에 일제 부역자 흔적 많아
끝내 꼿꼿했던 예술가 작품, 심금 울리고

전후 세대가 배운 교과서의 교범으로 쓰였던 교재의 저자 면면은 거의가 반민족행위자였다.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노천명 채만식 서정주 등 소년기의 감성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죽이는 글발'의 거장들이 모두 부역자들이라니. 목숨을 부지키 위해 도리 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왜의 식민지 정책에 앞장섰다니.

그들의 저술을 들여다보며 인문의 문턱을 기어오른 세대로선 참말로 믿고 싶지 않은 쓰라린 사실이었다. 안중근과 유관순을 기리는 한편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죽인 침략자의 턱찌끼로 연명한 자들의 훈도라니. 반민특위의 해체로 인적 청산의 기회는 사라지고 첫 단추를 잘못 꿴 채로 앞섶을 여며나간 가당찮은 세월이었다. 국권이 침탈된 시기 호의호식한 자들이 부끄럼도 없이 나댔다.

그런 역사를 바로잡느라 평생을 헌신한 임종국 선생을 위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추적으로 부역자들의 행적이 속속 드러났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진실 찾기이지만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늘어난 세월만큼이나 치러야 할 대가 또한 만만찮은 크기로 불어나 있다. 이미 학습된 후과로 주름진 정서가 그러하고 곳곳에 남겨진 그들의 흔적은 지우기엔 그 자국이 너무 크고 광범위하다. 시, 소설, 희곡 등의 문학 작품에나 남인수 반야월 백년설 등 대중에 깊이 파고든 가요계에는 물론이고 세종대왕 동상도 논개 영정도 그들의 손에 의해 주물러지고 그려졌으니 말이다. 참으로 황당하고 무참한 일이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닷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로 시작되는 '희망의 나라로'란 노래 역시 국경일에 흔히 연주되는 애국 레퍼토리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1931년 현제명이 작시 작곡한 이 노래가 희구하는 '희망의 나라'는 조선의 미래가 아닌 일본의 대동아 공영을 찬양하고 기구하는 것이란다.

그뿐이랴. 홍난파, 조두남, 김동진 등 시대의 수재들이 벌인 친일행적 또한 만만찮으니 어쩌랴! 성불사의 밤, 고향의 봄, 봉선화, 나물 캐는 처녀, 고향 생각, 선구자, 그 집 앞, 가고파… 청춘의 가도에서 가슴 설레며 불렀던 저 주옥같은 노래들을 복잡한 시선으로 보게 됨은 또 얼마나 쓰라린 일인가.

그 시절 대부분 음악가, 예술가들이 친일의 대열에 섰다. 그게 일제의 압력에 의해서건 생활고 때문이건, 정녕 꼿꼿한 이는 없었던가?

김순남은 '자유의 노래'로, 정율성은 '연안송'으로 항일의 뜻을 드러냈고 작자 미상이지만 '추도가' '혁명가' 같은 노골적 항일노래의 기록이 전해져 온다. 그 귀한 이 중 가장 인상적 인물이 '채동선'이다.

채동선은 1901년 벌교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 경기고보로 진학해 당시 장안의 손꼽히는 바이올린 연주가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운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고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다. 그러곤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독일로 옮겨가 베를린의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고 1929년 귀국한다. 이화여전에서 음악 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당시 많은 음악가가 후생단 등 일제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하면서 흰 한복에 두루마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낮에는 농사꾼으로 밤에는 국악 채보에 전념해 민족음악 수립의 기초를 쌓았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절친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여 여동생인 소프라노 채선엽을 통해 발표한 노래가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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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한 정지용의 시와 저서들이 금서가 되던 시기 이 아름다운 곡은 대신 이은상의 시를 얹어 '그리움'이 되었다가 박화목의 시에 붙여 '망향'으로 불렸다. 한편의 멜로디에 당대 최고들의 시 세 편이 붙은 셈이다.

채동선의 '고향'과 '그리움'과 '망향'이 심금을 울리는 4월. 또 한 번의 4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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