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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묘] (13) 경화인(京華人)과 향곡인(鄕曲人)

나한거사(羅漢居士) webmaster@idomin.com 입력 : 2019-04-30 10:35:41 화     노출 : 2019-05-01 00:00:00 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자녀들에게 남긴 말 중에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서울’ 발언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마라. 멀리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며 사회적으로 재기하기 어렵다!”

무려 180여 년 전에 나온 이 말이 지금도 왕왕 호출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서울만 살찌고 모든 지방이 앙상해지는’ 모순이 날로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은 식민지다>를 쓴 강준만 교수는 재미교포 기업인이 서울에서 체험한 기가 막힌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2004년 이야기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는 사업상 미국 전역을 여행할 기회가 잦았다. 고객이나 공급업자들과 간단한 인터뷰를 하려 해도 각각 다른 도시들을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5일 정도는 길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 오고 난 뒤 국내 여행 횟수는 제로에 가까워졌다. 모든 것이 서울에 위치해있고, 모든 비즈니스가 서울에서 행해진다. 아주 드물게 고객의 공장이 있는 울산을 찾아가는 것을 빼면 필요한 정보 대부분은 서울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 대기업 중에서 본사를 서울 외곽에 둔 곳은 하나도 없다. 50대 기업 중에서 어느 한 곳도 서울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토록 한 도시에 모든 것이 심각하게 집중돼 있는 곳은 없다.”

놀랍지 아니한가? 다들 뻔히 아는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인력과 돈이 서울에 몰려있기 때문일까? 기회를 잡으려면 서울에 있어야 하기 때문일까? 그런 요인도 크지만 180여 년 전에 다산이 ‘서울 수성’을 강조했듯이 그 역사적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한반도에서 첫 통일왕조를 연 신라를 보자. 신라는 처음부터 수도 경주(王京)에 사는 사람들과 지방민들을 구별하고 차별했다. 애당초 정복국가로 출발했기에 왕경 이외의 지역은 정복지 혹은 복속지로 인식됐다. 왕실과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한 골품제도 이를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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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비록 통일전쟁 과정에서 지방민을 자국민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으나, 왕경인과 이들을 차별하는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삼국통일은 이러한 골품제에 기반한 차별 구조가 확대된 것이었다. 새로운 피정복민인 옛 고구려인과 백제인은 왕경인과 신라 지방민을 잇는 차별구조의 말단에 편입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옛 고구려인에게는 7관등인 일길찬까지, 옛 백제인에게는 10관등인 대내마까지만 관등을 수여했다.

물론 신라의 차별정책 자체를 수도 패권주의로 규정하고 지금과 같은 모순을 잉태한 원류라고 보긴 어렵지만, 이 정책이 한민족에게 수도에 거주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아로새겼다는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실제로 신라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은 왕경인 금성(金城·경주)에 거주하는 것이 귀족의 정체성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왕경은 단지 수도라는 위상만 지닌 것이 아니라 지배층이 거주하는 배타적 공간이었으며, 왕경과 지방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경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고려가 통일신라를 대체하고 골품제가 무너지자 수도 일극주의(一極主義)는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다. 고려에서도 개경이 중시된 건 마찬가지였으나, 신라처럼 대놓고 타 지역을 차별하는 일은 없었다. 경향(京鄕) 차별이 재점화된 것은 조선 후기 들어 붕당정치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그 전개 양상은 신라가 울고 갈 수준에 이른다.

17세기는 정치적 불화가 들끓고 이에 따른 당파 간 격돌이 쉼 없이 이어지던 시대였다. 중앙에서는 잘나가는 양반들로 구성된 벌열(閥閱·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큰 벼슬을 한 사람이 많은 집안)이 대두됐는데, 엘리트층 상층부로 부상한 벌열은 양반을 중앙에서 군림하는 벌열과 지방에서 주변화된 나머지 엘리트층으로 양분했다.

그렇게 주변화된 사족(士族·양반)들은 이른바 ‘한문(寒門·몰락한 가문)‘으로 불렸다. 여기서 추울 한은 반드시 물질적 빈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벌열의 시각에서 볼 때 공적(公的)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때문에 농촌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족은 수도 거주자를 일컫는 경화인(京華人)에 의해 촌사람이란 뜻을 지닌 향곡인(鄕曲人)으로 비하되었다. 나아가 수도에 거주하는 엘리트층은 재지(在地·지방거주) 엘리트층을 ‘미천한 지방인(地處卑微·지처비미)’ 또는 ‘신분이 낮은 무리(門地卑賤·문지비천)‘라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부르며 위화감을 조성했다.

이같은 사회적 공간적 불이익은 재지 사족이 관직에 진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 참여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과거 급제가 갈수록 어려워짐에 따라 그들은 더 이상 의사결정권을 지닌 최고위 관직에 오르는 데 필요한 정치적 추진력을 키울 수 없었다.

더욱이 수도까지 가려면 며칠씩이나 걸렸기 때문에, 짧은 공고 기간 이후 수시로 시행되던 부정기 과거를 치르기에도 불리했다. 게다가 부정기 과거는 경전에 대한 지식보다는 문학적 소양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도시 거주자의 취향과 능력에 적합했다.

18세기 들어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 세상이 되었지만, 서인이라 하더라도 전라도 사람들은 경향 격차가 커짐에 따라 자신들이 정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관계(官界) 진입이 불가능해진 이 당시 사족들이 남긴 문집에는 종종 “그는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겸양이 아니라 벌열 정권에 대한 우회적인 불만과 비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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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에 있는 사빈서원. /안동시

18세기 초 안동에서 발생한 사빈서원 철폐 사건은 붕당과 경향 차별로 얼룩진 당시 시대상을 극명하게 알려주는 이야기다. 의성 김씨인 남인(南人) 유학자 김진과 그의 다섯 아들을 모시는 사우(祠宇·조상을 모시는 사당) ‘사빈서원(泗濱書院)’은 1717년에 서원 전체를 철거하라는 왕명을 받는다. 이 예기치 않은 왕명을 유도한 자는 경상 좌도 암행어사 이명언이었다.

이명언은 서인(노론)이었다. 그는 안동에서 가장 현달한 축에 속한 의성 김씨 집안을 고깝게 보았다. 그래서 의성 김씨가 그토록 많은 인적 물적 비용을 들여 만든 사우가 불법적인 개인 서원이라며 왕에게 일러바쳤다. 이 때문에 안동부사가 불법서원이 들어서는 걸 막지 못했다며 파직당했다. 이 일은 사실상 시골에서 잘 나가는 남인 집안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었다.

청천벽력같은 철거명령이 내리자 흥분한 김씨 친척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쁜 소식을 알리는 통문이 일대 모든 서원과 사우에 전해졌고 그해 철거명령이 부당하다는 상소문이 작성됐다. 이 상소문은 김진이 당대의 명유(名儒)와 교류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저명한 유학자 정경세가 그의 묘갈명을 썼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또한 진의 다섯 아들이 모두 퇴계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아버지와 아들들을 함께 배향하는 것은 중국의 전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상소문은 특히 이 서원이 사적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선현(先賢)을 모시는 장소로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친인척으로부터 기부받은 재물과 상소문을 들고 종손(宗孫) 일행은 그달 말에 도성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수도에 머무는 두 달 동안 그들은 새해를 경축하는 며칠을 제외하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쓰라린 좌절감을 맛보았다.

자신들의 상소를 고위관리로부터 인가받기 위해 여러 관청을 바쁘게 돌아다닐 때 이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촌티 나는 유생들’이라는 굴욕적인 말을 수시로 들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강요에 의해 상소문 표현을 여러 차례 수정해야 했다.

그들이 맞닥뜨린 가장 큰 장벽은 그들을 번번히 무시한 강경파 승지 조도빈이었다. 이명언과 같은 노론인 조도빈은 ‘남인 촌놈’들에게 퇴로를 열어주지 않을 심산이었다. 이윽고 양식과 여비가 떨어지면서 종손 일행의 수도 체류는 곧 악몽으로 바뀔 판이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1718년 2월 7일에 그들은 서원의 이름이 적힌 현판을 제거하고 그곳을 개인의 영당으로 바꾼다는 조건하에 상소에 대한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종손 일행은 조상을 지켰다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들이 서울에서 겪은 고초와 열패감은 쉽게 아물어질 수 없었다.

김진의 후예들은 그래도 재지 사족 중에서는 잘 나가던 집안이었다. 그 정도 힘도 없고, 가까운 조상 중에 과거를 통해 출사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재지 사족들은 급기야 양인들처럼 양역(良役·조선시대 양인 남자에게 부과하던 각종 부역)을 져야 할 위험에 처했다. 갈수록 깊어지는 경향 격차가 아예 시골 양반을 양반 구실도 못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걸 두고 예전에는 개인의 능력부족을 거론했으나, 18세기에는 그런 불행이 종종 “그는 관직에 나아갈 뜻을 접었다(絶意仕進·절의사진)”라는 미사여구로 채색됐다.

물론 경화인과 향곡인을 이토록 차별하는 풍조가 마냥 용인된 것은 아니었다. 뜻있는 선비들은 이 폐단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비분강개했다. 국왕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려 했다.

17세기 중엽 한 서인 고관은 효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조 초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김우옹과 유성룡은 영남의 선비였고, 박순과 정철은 호남에서 나왔습니다. 나머지는 이루 열거할 수 없는 초야의 먼 곳에 살고 있던 선비로서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고관이 되었습니다. 하오나 요즘은 호남이나 영남 선비가 조정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명문과 우족(右族·즉 벌열)의 성원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현명하다고 할 수 없듯이, 초야의 선비라고 하여 어찌 하나같이 재주가 없고 현명하지 못해 등용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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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론 관리 명곡 최석정. /국립청주박물관.
존경받던 소론 관리 최석정은 1696년에 “인재를 등용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사회적 배경을 숭상하여 서울사람을 앞세우고 시골사람(향인)을 뒤로 미룬다. 이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을 쓰는 원칙에 어긋난다”라고 불만을 표했다. 이 인용문이 예시하듯 수도에서 영남이나 호남에 거주하는 사족이 차별받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효종실록>에는 비변사에서 올라온 다음과 같은 글도 실려 있다. 벼슬자리를 꿰차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 서울 벌열 출신이라는 점을 통박하는 이야기다.

“생각건대 지금까지는 원근을 막론하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전대의 재상과 명인들이 대부분 초야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선조대의 경우 조정에 등용된 자의 반수가 호남과 영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외방(外方·수도 이외 지방) 출신의 조정 관료는 열 명 가운데 겨우 2~3인에 불과합니다. 인재의 성쇠라는 것이 안팎으로 순환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이토록 엄청나게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벽은 생각보다 두꺼웠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시행하여 수도에 거주하는 벌열을 견제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왕 역시 혼자 정치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와 밀착된 소수 인물과 그 출신 가문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는데, 그들 역시 경화벌열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울을 제외한 지역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배제되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이조판서 정휘량과 참판 남태제를 불러 나누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비와 이슬은 땅을 가리지 않고 내린다. 임금은 하늘의 도를 본받아 정사를 하는데 어찌 서울에 사는 문벌만을 관직에 등용하겠는가. 이제부터는 재주가 있으면 등용할 것이니 먼 지방인이라 하여 구애받지 말라!”

그러자 인사를 책임 진 판서와 참판이 깜짝 놀랄만한 답을 한다. 남태제는 “신 등이 만약 서울 벌열 자제를 먼저 등용하지 않으면 온 세상이 놀랄 것이니 어떻게 이 자리를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정휘량은 “향인이 관직에 있을 경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뿐더러 서울 출신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벌열 자제를 등용하지 않으면 자기 자리를 보존할 수 없다는 망언을 임금 앞에서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런가 하면 향인은 관직에 있기만 해도 불미스런 일을 일으킨다는, 근거 없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의 세력이 워낙 공고했기에 국왕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조가 죽고 대를 이어 어린 왕들이 즉위하면서 벌열 세력이 맹위를 떨치자 누적된 모순을 시정하려는 작은 목소리조차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일반 민중들은 어땠을까? 명색이 사족이라는 이들도 시골에 산다는 이유로 이런 차별을 받는 판에 일반 민중들이야 오죽했을까! 기록 부족으로 세세하게 그려지지 않지만 반상(班常) 차별에다 지방차별까지 더해져 백성들이 겪은 수난은 십중팔구 개돼지 수준이었음이 틀림없다.

행정안전부가 지난해 말 입법 예고한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주목받고 있다. 아니 서울에서는 눈길도 주지 않는 법안이다. 국무회의 통과 후 2019년 4월 현재 국회심의를 앞두고 있는 이 개정안은 주민조례발안, 주민감사, 주민소송의 기준연령을 19세에서 18세로 하향 조정해 주민참여를 촉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주민 주도로 마을의제를 수립하고 선정된 마을계획을 이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주민자치회의 설치 운영에 관한 사항’을 담고 있다.

과연 이런 소박한 카드가 서울에 짓눌리는 향토 시골에 작은 힘이라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나아가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할 수 있을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복잡하고 다원화된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1950~60년대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한국정치를 “중앙권력이라는 단극자장(單極磁場)으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라고 간파한 바 있다. 그는 심지어 “서울은 단순히 한국의 최대 도시가 아니라 서울이 곧 한국”이라고 지적했다. 21세기 서울, 그것도 알짜배기 강남에 터 잡은 ‘자본 벌열’과 그들을 옹위하는 ‘관료 벌열’에 맞서 현대 향곡인들이 내세울 카드가 기껏 자치법 개정안이라는 게 우리를 슬프게 한다.


참고자료

♣ 강준만 지음, <지방은 식민지다>, 개마고원

♣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김우영·문옥표 옮김, <조상의 눈 아래에서>, 너머북스

♣ 고영진 지음, ‘한국에서 지역주의의 역사적 맥락’(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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