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시민 자발적 기부금 모아 마산구락부 운동장 조성
행사마다 대중 몰려 인산인해…공유재산으로 관리, 의미 남달라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선거관리위원회와 노산동행정복지센터가 있는 육호광장 일대가 마산구락부 운동장 옛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육호광장 일대에 역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기차로, 혹은 걸어서 운동장(약 3000평)에 모여 야구와 축구 등을 즐겼다고 한다면 '깜짝 놀랄 이'가 적지 않을 듯싶다.

마산구락부 운동장은 지난 1921년 10월 6일 완공된 이후 1937년께 사라지기 전까지 당시 시민들의 체육·문화 활동 중심지였다. 야구, 그리고 축구·육상·자전거·마라톤 등 각종 운동 경기와 갖가지 행사가 열려 지역 체육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곳이다.

마산구락부 운동장은 이 지역 야구 밑바탕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운동장 건립 이후에도 특정 개인이나 '관'에 맡기지 않고 공유재산으로 관리하고 활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작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 1920년대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창신학교 운동회가 열리자 마산시민이 몰려든 모습/경남야구협회

마산구락부 운동장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운동장 건립 과정을 설명하려면 마산구락부 결성부터 더듬어 나가야 한다. '구락부'는 지금으로 치면 '클럽'이다.

일제는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무력과 강압만으로는 통치가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이른바 '문화 통치' 시작이었다. 일제 통치 방식이 회유적 통치로 바뀌면서 일부 단체 활동과 언론이 허용됐다. 이 시기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 운동이 전개됐으며, 마산구락부도 이런 흐름에서 만들어졌다. 마산구락부는 주로 교육과 체육, 계몽활동에 중점을 뒀다. 문화운동이자, 청년운동을 펼친 셈이다.

마산구락부는 1920년 6월 12일 발기총회를 열어 상업학교, 운동장, 청년회관 건립을 우선사업으로 결정한다. 이듬해인 1921년 3월 3일 임시회총회에서는 마산구락부 운동장 기성회와 장래발전 방침을 토의·결의해 모금에 들어갔다. 같은 해 4월 운동장 건립 장소로 현재 육호광장 일대인 노비산과 구마산역 평야를 사용하기로 하고 '땅 사들이기'에 나선다. 애초 운동장으로 검토됐던 곳은 추산정(현재 창원시립마산박물관 근처) 일대였다. 하지만, 산지인 탓에 비용이 많이 들고 분묘와 전주를 옮겨야 하는 문제 등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마산구락부 운동장 기성회를 조직해 모금 활동을 펼친 결과, 지역 유지 옥기환과 구성전 등이 각각 300원을 출연한 것을 비롯해 시민 기부금 6600원이 모였다. 1921년 7월 본격적인 운동장 건설이 시작되자, 마산구락부는 날마다 인력 50명을 동원해 1921년 10월 6일 운동장을 준공한다.

운동장이 준공되고서 열린 첫 행사는 1921년 10월 14일 창신학교 운동회였다. 당시 창신학교는 운동장에서 불과 '걸어서 5분 거리'인 노비산 자락에 있었다. <동아일보> 1921년 10월 24일 자 기사는 '남녀노소 관중은 광활한 운동장 주위와 노비산으로 운집해 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옮겼다. 마산구락부 운동장은 바로 앞에 구마산역이 있어 접근성이 뛰어났다. 정확성을 겸비한 대규모 이동수단인 기차가 당시로는 큰 문화행사인 운동회 소식을 들은 시골 구석구석에 있던 많은 이들의 '들뜬 마음'까지 함께 싣고 왔으리라 짐작된다.

당시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열린 흥미로운 야구 기사도 눈에 띈다. <동아일보> 1922년 6월 21일 자엔 '분규(紛糾)로 막(幕)을 종(終)한 마산소년야구회 원인은 심판 잘못'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야구 경기 특성상 '그때나 지금'이나 심판 판정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기사는 그해 6월 17일 마산소년야구대회 공립보통학교와 창신학교 결승전에서 보통학교 측이 '심판의 무리함에 분개하여 교정하기로 요구했으나 만족한 해결을 얻지 못해 불평을 품고 탈퇴'했다고 적었다. 이 기사 끄트머리는 '흥분된 선수와 기타 관계자들이 말썽을 일으켜 모처럼 주최한 소년야구회는 분규로 막을 내렸다'고 전했다. 즉 마산에서 열린 야구경기 가운데 '첫 몰수 게임'이었던 것이다.

앞서 1922년 3월 28일에는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당시 마산야구계의 거두였던 고 박광수, 황의찬 선수에 대한 추도회가 거행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이 이곳에서 야구 경기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1923년 6월 15일 오후 3시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신마산 일본인으로 조직된 글로리팀과 구마산 '조선인 올팀'이 경기해 13-4로 구마산이 크게 승리했다. 1926년 창단한 구성야구단은 이듬해인 1927년 6월 12일 오후 2시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일인실업청년회야구부 실업단과 맞붙어 17-16으로 '진땀승'을 거두기도 했다.

1923년 5월 28일엔 이곳에서 마산체육회 주최, 마산구락부와 기타 신문사 후원으로 '전조선 자전거 겸 마라손(톤)대회'가 이틀 동안 열렸는데, 엄복동과 문판개 선수가 각각 출전해 우승했다. 엄복동은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유행가가 만들어질 정도로 당시 '인기 절정의 스타'였고,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문판개는 나중에 마산역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우무석 시인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는 운동 경기나 운동회뿐만 아니라 어린이날 행사, 수천 명에 이르는 군중이 모이는 금주·단연(금연) 선전기 행렬 등도 열려 당시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위안거리를 제공했다.

박영주(59) 지역사 연구가는 마산구락부 운동장 의미에 대해 이렇게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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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구락부 운동장은 일제강점기 순수하게 당시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만들어졌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더구나 운동장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한 개인이나 행정당국에 맡기지 않고 공유재산으로 관리하고 활용했다는 사실도 특별히 다루어 기록해둘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운동장을 만들고 운영해 나간 일련의 과정을 관통하는 바탕은 '건강한 공통체'를 지향하는 정신이었습니다. 체육 활동을 장려하고, 체육 발전 기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오늘날 문제의식을 계승해야 하는 역사적 당위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쉽게도 마산구락부 운동장은 1937년 10월 15일 창신학교와 의신학교 운동회 소식을 끝으로 더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정확하게 언제, 어떤 이유로 운동장이 매각됐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1934년 6월 공유재산 관계자들과 지역 유지들이 협의해 마산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공유재산(민의소 땅과 건물, 추산정 일대, 현금 약간 등)과 마산구락부 운동장 등 전체를 마산중앙야학교의 기본재산적립에 기부하기로 한 점, 그 무렵 공유재산정리회의 한 개인이 무단으로 공유재산 일부를 일본인에게 처분한 사실이 드러나 지역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으며, 일제까지 개입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띤 점 등이 '운동장 소멸 과정'을 설명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마산구락부 운동장의 대척점에는 '중앙운동장'이 있었다. 일제가 옛 마산소방서 건너편 중앙동의 장군천과 월포교 근처 철도용지 약 5000평을 무상으로 기증받아 1924년 5월 31일 착공, 1926년 1월 26일에 완공했다. 중앙운동장은 한국인만을 위한 행사에는 좀처럼 개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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