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러스트 작가 에세이 '더 사랑할 힘' 되는 기억들

최근에 지인들과 부산에 다녀왔다. 거리상으로도 멀지 않고 할머니 댁이 있어 백 번도 넘게 가본 곳이지만 주말 교통량과 주차를 생각하면 부산은 언제나 마음으로 멀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부산에 갈 일이 생겨도 최대한 정해진 일정만 빨리 끝내고 돌아오는 편이다.

이번 부산행의 경우는 지인들과 여행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조금은 즉흥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여느 때와는 다르게 마치 관광 온 외국인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오후 느지막이 도착한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젊은이들,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기분 좋은 설렘도 잠시, 식사를 하지 않아 허기가 밀려드는 것을 느낀 우리 일행은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 바다 앞 작은 전통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일행들에게 해운대는 자주 왔지만 전통시장은 처음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불현듯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스쳐갔다.

▲ <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기억

'이전에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가?'

생각을 더듬어 보니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할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그 전통시장에 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당시 벡스코에서는 '인체의 신비'라는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부산의 한 지역 방송에서 학생들이 꼭 봐야 하는 유익한 전시라고 꽤나 가열하게 홍보를 했었다.

'학생들에게 유익한, 꼭 봐야 하는 전시'라는 어디 하나 특별할 것 없는 광고성 멘트였음에도, 방학기간을 맞아 찾아온 손자를 둔 할아버지에게는 그 한마디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좀처럼 집 주변을 벗어난 활동을 하지 않으셨던 할아버지는 더운 여름 날씨와 불편한 교통편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걸리고, 버스에 태워 전시장으로 갔다.

사실은 시원한 할머니 집에서 만화 영화나 보는 게 더 즐거웠던 우리지만 할아버지의 열정에 찬 눈빛을 보며 동생과 나는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학생들이 보기에는 다분히 충격적인 전시였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학구파 학생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고, 열심히 날 것의 근육들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며 전시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전시를 관람한 후에 할아버지와 우리 남매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는 뜻 모를 만족감에 휩싸였고 약간은 상기된 감정 속에서 내친김에 바다도 구경하고 그곳 전통시장에서 떡볶이도 사 먹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그날의 여름 날씨처럼 짧고도 강렬했다.

시간이 흘러 동생과 내가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할아버지 댁으로의 발길은 뜸해졌고 한동안은 그날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과연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러나 좋았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더 강하게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해운대 전통시장 한가운데서 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내게 할아버지의 휴대폰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던가?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눠본 것은 언제였더라,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볼까? 할아버지와 왔던 해운대에 놀러 왔다고, 그러다 함께 바다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고.

그러나 나는 결국 할아버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이런 순간들은 너무나 빈번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대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다음에'라는 결과에 이른다.

언젠가 지금,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

◇벚꽃

마스다 미리의 <영원한 외출>이라는 책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보지 못한 벚꽃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올해는 아직 벚꽃을 못 봤네.'라는 아버지의 말에 함께 꽃구경을 갔으면 하는 의중이 담겨있음을 알았지만, 성미가 급한 아버지가 같이 가면 신경이 쓰일 게 뻔해 마스다 미리는 엄마와 단둘이 산책을 나선다.

"걸으면서 역시 아버지도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엄마와 셋이 벚꽃 가로수 길을 걷는 일은 앞으로 몇 번 없을 터다. 실제로 아버지는 반년 뒤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그날, 셋이 둑을 걸었더라면 우리는 어떤 얘기를 했을까. 아버지는 이웃사람들에게 '날씨가 좋네요' 하고 한 손을 들어 인사했을까. 아니면 쑥스러운 듯이 웃기만 했을까. '두 미인 데리고 좋겠구려' 이웃 사람들이 아버지를 놀리는 소리까지 상상됐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영원한 외출>에서 작가는 아버지와 함께 그해의 벚꽃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날은 아버지와 함께 벚꽃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떠오른 마음을 전하고 귀찮아하지 말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가족의 죽음

<영원한 외출>은 일본의 30~40대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국에서도 두꺼운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인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다. <수짱 시리즈>를 비롯해 이미 많은 만화와 에세이집을 출판한 그녀는 현재에도 꾸준히 연재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나 역시 담담하고 요란하지 않은 작가의 어조를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종종 작가의 책을 꺼내 읽곤 한다.

<영원한 외출> 역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소소한 일상을 기반으로 한 에피소드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어쩐지 작가의 다른 에세이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를 전달해 준다.

집필한 2년의 기간 동안 작가가 경험해야 했던 '가족의 죽음'이라는 가볍지 않은 소재의 특수성도 있겠지만 다른 어떤 곳에도 기고하지 않고 이 책을 통해 그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책 속의 어조와 문체는 마스다 미리의 본래의 그것이지만 글을 읽을수록 작가의 내적인 파동을 전달받게 된다.

삼촌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이 책은 또 다른 가족인 아버지의 암 선고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원한 외출>은 '죽음'에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힘들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역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혹은 마주해야만 하는 이런저런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는 시점에서 이미 마스다 미리는 아버지의 사망 등록과 유품정리를 끝낸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일들과 마주하게 되어도 그럭저럭 잘 이겨내는 모습이다. 단지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때의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와 호기심에 대한 언급이 전부일 뿐, 격앙된 어조는 느껴지지 않는다.

◇애도

우리 모두는 한 번의 생과 한 번의 죽음을 공평하게 겪는다. 모두에게 처음인 이 삶은 언제나 실수투성이이며 특별한 정답도 없다. 그래서인지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순간이 아쉽고 애틋하지만 사랑했던 이의 부재는 그런 감정들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든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영원한 외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는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오지는 못할 테지만 작가는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일상의 단편 속에서 사랑했지만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누군가의 빈자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후회와 그리움, 아쉬움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과 함께 그들을 그려야 하겠지만 누군가를 애도하고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그 모든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순간의 마음을 아끼지 않는 것, 표현에 쩨쩨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만큼 덜 후회하고 더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마스다 미리의 <영원한 외출>을 통해 그 유언 같은 지혜를 마음에 담아 본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