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민주화'한국현대사 두 줄기, 마산항서 시작됐다

한일강제병탄조약(1910) 이후 일제강점기 마산항은 개항장이 아닌 적출항(積出港)이 돼 일제 수탈과 군사 전진 기지로 탈바꿈한다. 민족사적 관점에서 비통한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일제강점기 36년은 마산항이 현대 '산업화·민주화 중심 도시 창원' 골간을 세운 시기이기도 했다.

◇마산만 매립과 저항 = 개항을 계기로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 경제적 이익과 필요에 따라 마산만 매립에 나섰다. 일본인에 의한 마산만 매립 횟수는 총 24회로 규모는 대략 32만 5000평이었다.

그 목적은 농지 활용, 기업과 개인에 분양·임대, 사업장 확장 등으로 다양했으나 그중에서도 조선총독부가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항만과 부두, 이를 잇는 철도 용지 마련을 이유로 행해진 게 많다. 매립은 저비용으로 토지를 창조해 큰돈을 단번에 쥘 수 있는 원시적 축적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마산만 매립은 '도시 수탈'이 그 본질이었다.

마산 민중은 이를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외국인 토지 불매 운동, 사립 일어학교 반대와 폐쇄 운동, 일본인 광산 이권 침탈 항거, 장시 환원 운동, 신상회사(상인 중간착취 기관) 혁파와 구마산 상인 투쟁, 일본군 병참 수송 부역 거부 운동 등 꾸준한 투쟁을 벌였다. 일제가 행한 수탈적 마산만 매립·개발은 현대 마산항이 제 모습을 갖추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일제강점기 사회 전 영역에 걸친 항일독립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이는 다시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를 이끈 '저항 마산' 뿌리를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 1977년 마산수출자유지역 2공구 조성 공사 모습. /창원시

◇진전하는 산업화 = 마산항은 1949년 6월 29일 정부가 대통령령 39호로 개항장으로 지정한 뒤에야 무역항 역할을 되찾는다.

다만 이듬해 한국전쟁 때에는 한국군과 유엔군 병참수송 기지로 활용됐다. 항만과 철도가 적절히 배치된 마산에는 주로 미군 병기와 수송·보급 부대가 주둔했다. 마산이 그만큼 지리적·산업적으로 물류 수송과 국제 유통에 장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연결망은 공업도시 조성에 유리한 조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산항 뒤쪽으로 무학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마산만이 펼쳐져 대규모 산업시설을 수용할 터가 부족했다.

한반도 남부 해안에 자리한 마산은 한국전쟁 당시 주요 피란처이기도 했다. 1946년 8만 명이던 마산 인구는 1951년 13만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에는 10만여 명이 마산에 살았다. 남자들은 주로 부두 노동이나 어시장, 각종 공사장에서 막일을 했고, 여자들은 군복을 수선하는 등 일로 생계를 꾸렸다. 풍부한 인구, 공업도시로 발달하게 좋은 지리적 조건 등이 맞물리면서 산업화 시기 마산은 큰 변화 바람을 맞는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박정희 정부 경제개발이 가속화하면서 마산항은 수출자유지역과 창원 대단위 기계공단을 지원하는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산은 일제강점기부터 섬유 산업이 발달했는데 1960년대 후반 마산항을 중심으로 대형 방직 공장이 생기고 기존 모방직 중심에서 화학 섬유로 기술 고도화가 이뤄지면서 새로운 도약을 하기에 이른다. 창원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 기계공업 발달은 마산항을 대규모 화물 운송이 가능한 중심 무역 항만으로 발전하게 했다. 이때 마산역에서 마산항 제1부두까지 이어진 임항선(臨港線)은 내륙 운송 첨병 역할을 했다. 1973년 남해고속도로, 1977년 구마고속도로(현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도 마산 번성에 힘을 보탰다. 수출 전진 기지가 된 마산에는 많은 공장이 들어서고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도시에는 활력이 돌았다. 그리하여 1980년 마산항 수출입 화물량은 1966년 대비 수입은 2배, 수출은 7배로 늘었다.

▲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인양한 마산항 중앙부두. /창원시

◇진보적 노동운동과 민주화 = 한국전쟁과 산업화 진전으로 말미암은 급격한 인구 팽창으로 마산은 한때 전국 7대 도시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급속한 경제 발전의 영광 뒤에는 그늘이 존재했다.

늘어난 인구에 비해 적은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는 원인이 됐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노동자층이 생겨났고, 생활 터전을 확보 못 한 도시빈민층도 확산했다. 이 같은 사회구조적 모순에 따른 피해는 부두노동자들이 특히 심했다. 이들은 미숙련공인 데다 이합집산이 많은 자유노동자라 임금 수준이 다른 산업노동자에 비해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마산에서 일어난 진보적 노동운동도 이 부두노동자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구심에 노현섭(1920∼1991) 선생이 있었다. 중앙대 법대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 마산보통상업학교(현 용마고)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3개 부두 노조를 통합한 단일 지역 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했다. 그는 1954년 마산자유연맹위원장을 거쳐 전국자유연맹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노동 운동에서 주도적 인물로 활약했다.

▲ 마산역에서 마산항 제1부두까지 이어진 임항선 옛 북마산역. /창원시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우리나라 경제는 국외 원조에 의존해야 할 만큼 어려웠다. 높은 실업률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국민 불만이 큰 상황에 부패한 자유당 정권은 3·15부정선거라는 희대 사건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되고 나서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김주열 열사 시신이 떠오른 곳도 '마산항 중앙부두' 앞바다였다. 이는 길게는 대몽항쟁기 삼별초, 가까이는 일제강점기 마산만 매립을 비롯한 각종 일제 수탈에 항일독립운동 등 분연히 일어난 마산 민중이 이제 반(反)독재·민주화 투쟁 중심에 서는 계기였다. 마산항을 매개로 이뤄진 진보적 노동운동과 반독재 투쟁은 이후 1970~1980년 마산·창원지역 노동운동,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창원 민주화 항쟁 역사를 잇는 시발이 됐음을 부정하기 어렵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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